홈런타자는 왜 항상 4번일까
2015년 프리미어12 준결승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지금은 세계적인 스타가 된 오타니 쇼헤이가 아직 어린 투수였던 시절, 한국을 상대로 선발 등판한 경기였습니다. 오타니에게 완전히 타선이 틀어막혀 점수를 내지 못하던 대한민국 대표팀은 9회에만 4점을 뽑아내면서 역전승을 거두었어요. 제가 대학생 때 대표팀의 4번타자였던 이대호가 역전 안타를 치던 순간을 친구들과 함께 봤던 기억이 납니다.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4번타자가 홈런타자의 대명사라는 건 아마 대부분 알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9명의 선수들 중에서 4번 타자가 홈런타자의 대명사가 된 걸까요?
야구는 기본적으로 홈에서 출발한 주자가 3개의 베이스를 돌아서 다시 홈으로 돌아와야 점수가 나는 스포츠입니다. 물론 홈런으로 한 번에 점수를 낼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 선수들은 3개의 아웃카운트 안에서 출루를 통해 점수를 차곡차곡 쌓아나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경기가 시작해서 1번 타자부터 여러 상황을 시뮬레이션해가면서 어떻게 해야 가장 이상적으로 점수를 뽑을 수 있을지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입니다.
1번 타자가 안타를 쳐서 1루로 일단 출루한다. 1번 타자는 도루를 하든 후속 타자가 안타를 치든 일단 2루, 3루까지 빠르게 진루하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면 2번 타자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은 이 1번 타자를 득점권까지 진루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득점권에 주자가 배치되면 3, 4, 5번 타자가 장타를 노려서 주자를 불러들인다.
어때요. 보기엔 그럴듯하죠? 이게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생각하던 일종의 득점 공식이었습니다. 이 공식을 그대로 선수들의 타순에 연결해 보면 각 타순은 아래와 같은 능력치가 기대되는 선수들로 배치되는 것이 이상적일 것입니다.
1번 타자 : 1루까지 출루하고 득점권까지 빠르게 진루할 수 있도록 발이 빠르고 출루율이 높은 선수
2번 타자 : 주자를 득점권까지 진루시킬 수 있도록 컨택 능력이 좋고 번트와 같은 작전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선수
3, 4, 5번 타자 : 베이스에 출루한 선수들을 홈으로 불러들일 수 있도록 장타력이 있는 타자
6, 7, 8번 타자 : 비교적 타격 기회가 적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공격력이 떨어지는 타자
그래서 득점권에 주자를 배치하는 1, 2번 타자는 '밥상을 차린다'는 의미에서 '테이블세터'라고 부르고, 3, 4, 5번 타자는 테이블 세터들을 홈으로 불러들인다는 의미로 함께 묶어 '클린업 트리오'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지난번에 살펴본 수비 포지션과 묶어서 본다면 클린업 트리오는 보통 지명타자나 코너 외야수, 1루수가 맡는 경우가 많고, 6, 7, 8번은 상대적으로 수비 부담이 큰 유격수나 포수인 경우가 많죠.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 볼까요. 조금 이상한 점을 찾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봐도 저 라인업은 너무나 이상적인 상황만을 가정하고 각 선수들에게 역할을 부여했습니다. 실제로 야구 경기를 보다 보면 매 이닝마다 1번 타자부터 시작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득점 루트가 저렇게 이상적으로만 흘러가는 경우는 드뭅니다. 사실 이런 타순별 의미는 데이터를 야구에 제대로 활용하기 전, 그러니까 감으로 야구하던 시절부터 내려오던 고정관념에 더 가깝습니다. 현대 야구에서 저렇게 클래식하게만 타순을 짜는 경우는 별로 없어요. 타순별로 각각 타석에 어떤 상황을 마주할 확률이 가장 높은지, 가장 타격 기회가 많은 타순은 몇 번까지인지, 어떤 상황일 때 득점 확률이 가장 높은지, 우리 팀의 선수 특성을 고려했을 때 누가 몇 번 타순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적절한지 등을 데이터로 분석해서 최적의 타순을 도출합니다.
특히 최근 메이저리그를 중심으로는 '강한 2번'이나 '강한 1번'론이 떠오르고 있기도 합니다. 실제 데이터를 뜯어 보니 타순별 역할론은 별로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달은 몇몇 구단들이 '그렇다면 차라리 그냥 잘 치는 타자에게 타격 기회를 1번이라도 더 주자'는 생각까지 다다랐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올해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LA 다저스의 경우에는 팀 최고의 타자인 무키 베츠와 오타니 쇼헤이를 각각 1번과 2번에 세운 경기가 많았죠. 특히 극단적으로 장타를 중시하고 있는 메이저리그의 분위기가 이런 '강한 1번'의 생산력을 극대화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습니다.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지금 설명한 타순별 역할론은 현대 야구에서 데이터로 검증하는 과정을 겪은 후 완전히 새롭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물론 데이터가 야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들을 때쯤이면 아마 여러분은 이미 야구의 매력에 푹 빠진 후일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