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
배경 : 2010년대 초반, 나는 다문화 청소년의 한국사회 적응에 관한 연구용역을 수행한 적이 있다. 그때 만난 한 다문화센터장은 이렇게 말했다. “머지않아 다문화 아이들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크게 불거질 겁니다. 지금은 지원이 필요하지만, 곧 통합이 더 중요해질 거예요.”그 말은 예언처럼 현실이 되었다. 그 시절까지만 해도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에 대한 차별은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한국인 청소년이 역차별을 당하는 현상이 지방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오늘은 다문화 사회의 새로운 그림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 알지만 방법이 없다
강원도의 한 시골마을, 전교생이 8명인 초등학교 운동장 한가운데서 두 명의 아이가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가해 학생들은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었고, 피해자는 부모 모두 한국인인 아이들이었다. 교장과 교사들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말릴 방법이 없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훈육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건 예외적인 사례가 아니다.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도곡초등학교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덩치가 큰 러시아권 학생이 한국 학생을 상습적으로 괴롭혔지만, 학교는 손을 쓸 수 없었다. 결국 피해 학생은 전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다문화 가정이 사회의 약자였던 시절은 끝났다. 일부 지역에서는 그들이 지역사회의 다수가 되었고, 한국인이 오히려 소수자가 되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 현실을 ‘말할 수 없는 분위기’다.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다문화 감수성 부족’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교사는 침묵하고, 부모는 전학을 택하며, 아이들은 상처만 남긴다. 이런 구조적 침묵이 다문화 문제의 가장 어두운 지점이다.
□ 백호주의와 차별의 뿌리
2024년 미국 시사주간지 US뉴스&월드리포트가 발표한 ‘세계 인종차별적 국가 순위’에서 한국은 조사 대상 89개국 중 5위를 기록했다. 그동안 우리는 ‘단일민족의 자부심’을 말해왔지만, 실제로는 외세에 대한 열등감과 백호주의의 내면화가 무의식적 인종차별로 이어지고 있었다. 한국사회는 외모에 유난히 민감하다. 하얀 피부는 세련됨의 상징으로, 짙은 피부는 ‘촌스럽다’는 편견으로 연결된다. 이런 인식은 서양에 대한 동경과 아시아권 노동자에 대한 멸시로 이어졌고, 결국 그 차별의 역사가 지금의 역차별 구조를 만들어냈다.
‘우리’라는 말은 한국인이 가장 자주 쓰는 단어이지만, 그 속에는 늘 경계의식이 숨어 있다. ‘우리’는 혈연과 국적, 언어와 습관으로 구획된다. 그래서 조선족은 다른 어떤 인종의 외국인보다 더 큰 차별을 받고, 고려인과 재일교포는 여전히 ‘그들’로 분류된다. 혼혈인과 탈북민은 아시아계 외국인보다도 더 낮은 대우를 받는다. 그렇게 ‘우리’라는 말은 자부심이 아니라 배제의 장벽이 되었다.
□ 공존의 조건
예전의 다문화는 ‘배려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다문화는 더 이상 동정과 시혜로 설명할 수 없는 사회 구성의 현실이 되었다. 그들은 한국사회의 주변부에 머무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인구감소지역의 생존을 떠받치는 주체로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전남, 전북, 충남, 경북의 소멸위기 마을 중 상당수는 다문화 가정의 이주와 정착으로 학교가 유지되고, 농촌의 노동력 공백이 메워지고 있다. 다문화 가정의 존재는 더 이상 ‘보호 대상’이 아니라 지방소멸을 늦추는 인구·경제적 버팀목이다.
그럼에도 정부의 정책은 여전히 그들을 ‘지원받아야 하는 소수자’로 규정하고 있다. 이건 시대착오다. 이제는 ‘배려’가 아니라 ‘공존의 구조 재설계’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다문화 문제의 모든 갈등을 무시할 수는 없다. 지금의 역차별 논란은 공존의 기준이 불분명한 사회의 결과다. 공존은 단순히 서로를 이해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공존은 ‘같음의 기준’을 다시 세우는 일이다. 인정에는 우위가 있지만, 공존에는 평등이 있다. 우리가 과거 유럽과 미국으로 인력을 수출하던 시절, 차별을 당했던 경험을 잊지 말아야 한다.
로제가 프랑스에서 당한 인종차별, 조지아에서 받았던 모욕은 지금 우리가 다른 아시아인에게 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되고, 남은 안 된다는 내로남불이야말로 공존의 가장 큰 적이다. 진정한 다문화 사회는 관용이 아니라 공정한 기준과 상호 책임 위에서 세워져야 한다. 이제 함께 살아갈 사회를 설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