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7. 스며드는 온기

by NaeilRnC

공장을 떠난 뒤, 후인은 한동안 자신이 어디쯤 서 있는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긴장 속에서 버티던 마음이 갑자기 느슨해지자 기이한 공허감이 번져왔다. 일을 그만둔 날, 기숙사 방을 나와 짐을 들고 걷는데 바람 한 줄기까지 너무 선명하게 느껴졌다. 마치 자신이 갑자기 ‘두께’를 잃고 종잇장처럼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그 질문은 단순한 진로 고민이 아니라 인생의 다음 문으로 연결되는 두드림 같았다. 하지만 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며칠 뒤, 후인은 우연히 인쇄소 일자리를 소개받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손 빠르고 집중 잘하면 된다더라.”


집중. 그 말은 후인에게 언제나 익숙한 능력이었지만 그동안 너무 많은 마음의 에너지를 버티는 데에 썼기 때문에 일에 집중해본 기억이 오히려 희미해져 있었다.


첫 출근일. 인쇄소 문을 열자 기계에서 나오는 약한 열기와 종이 냄새가 후인의 온몸을 감싸며 들어왔다. 공장의 기계음과는 달리 여기 소리는 조금 더 둥글고 부드러웠다. 기계가 돌 때 나는 푸르르, 사그락, 철컥 하는 리듬이 이상하게 마음을 안정시켰다. 종이가 잉크에 닿을 때의 그 온기. 잉크가 마르는 찰나의 향. 정확한 규칙을 따라 움직이는 기계팔의 리듬. 이곳의 공기는 긴장 대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을 후인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 리듬 한 가운데 한 사람이 있었다. 선영이었다. 그녀는 인쇄소에서 일한 지 오래된 직원이었다. 그녀는 후인을 처음 봤을 때 지나친 친절도, 경계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 오셨어요? 오늘은 제가 알려드릴게요.”


목소리는 밝지 않았지만 따뜻함이 있었다. 조용하지만 분명한 존재감.

후인은 오래전부터 사람의 말투에서 그 사람의 온도와 거리를 느끼는 능력이 있었다. 선영의 말투는 아무도 불편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놓치지 않는 정직한 온도가 있었다. 그녀는 기계를 조작하며 설명했다.


“이건 잉크 조절하는 부분이고요. 초반에는 색이 좀 진하게 나올 수도 있으니까 이걸로 조금씩 조절해주면 돼요.”


후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설명을 따라가며 오랜만에 누군가의 말을 집중해서 듣는 자신을 발견했다. 공장에서는 대부분의 말들이 지시였고 지시는 곧 압박이었다. 하지만 선영의 말은 압박이 아니라 안내였다. 사소한 차이 같지만 후인의 마음에는 큰 균열을 일으켰다. 며칠이 지나자 선영은 자연스럽게 후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점심 먹었어요?”

“오늘 종이 색이 참 예쁘죠.”

“이거, 후인 씨가 한 게 더 깔끔한데요?”


그 작은 문장들이 후인에게는 예상치 못한 반응을 일으켰다. 감정이 너무 커서가 아니라 너무 정상적이라서. 사람이 사람에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 수 있다는 사실을 후인은 잊고 있었다. 누군가에게서 아무 의도 없이 오는 말은 단순한 대화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자존감의 마른 부분에 작게 스며드는 수분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후인은 그 수분이 얼마나 고팠는지를 그제야 알았다.


어느 날은 비가 유난히 세게 왔다. 인쇄소 뒤편 작은 휴게실에서 후인은 물기 묻은 유니폼을 털며 잠시 앉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선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힘들어요?”


그 질문은 언제나처럼 가볍지 않았고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았다. 그저 후인의 상태를 곧게 바라보며 던진 말이었다. 후인은 잠시 망설이다가 마음속 깊은 이야기들을 하나 둘 꺼내기 시작했다. 공장에서의 일들, 의심했던 순간들, 스스로에게 실망했던 날들, 누군가와 부딪힌 작은 갈등, 이 모든 것들이 어떤 파동으로 남았는지.


선영은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 가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갈 수 있는 틈만 잡아주었다. 이상하게도 그 침묵이 더 큰 위로였다. 말할 공간이 있다는 사실은 참 오래된 안도감을 준다. 각자의 삶에선 자신만의 짐이 있기 마련이지만 그걸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건 다시 걸을 수 있는 힘을 준다. 후인의 말이 끝났을 때 휴게실엔 비 소리만 가득했다. 그러다 선영이 아주 천천히 말했다.


“사람은요…실수해서 망가지는 게 아니라 실수를 숨기느라 더 힘들어지는 것 같아요.”


그 문장은 후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잔잔하게 파고들었다. 지금까지 후인은 자신이 흔들리는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실수와 흔들림은 약점이라 믿었고 약점을 드러내면 다시 상처받을 거라 두려워했다. 하지만 선영의 말은 달랐다. 그녀는 후인의 흔들림을 문제로 보지 않았다. 사람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후인은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에게 내려놓지 못했던 말 하나를 처음으로 속으로 중얼거렸다.


‘괜찮아. 너… 잘하고 있어.’


그 말은 누가 대신 해주는 말이 아니었다. 처음으로 스스로를 향해 건넨 말이었다. 그 사실이 후인의 가슴을 조용히 뜨겁게 만들었다. 그날 이후 후인은 인쇄소에 가는 발걸음이 조금 더 가벼워졌다. 기계가 빠르게 돌 때도, 잉크가 손끝에 묻을 때도, 종이가 한 장씩 쌓일 때도 그는 예전과 다르게 자신의 삶이 천천히 복원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는 않았지만 그 위에 새살이 돋는 느낌. 온기가 스며들 때 사람은 비로소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찾는다. 그리고 모기가 아무리 귓가를 맴돌아도 이제 후인은 그 소리에 전처럼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깨달았다. 구원은 누가 큰 것을 건네줄 때 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작은 말 한 문장, 아주 짧은 순간, 하루 중 특정한 눈빛 같은 것으로 찾아온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작은 순간들이 사람을 다시 살아가게 만든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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