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

9. 비우지 않는 구조 속에서

by NaeilRnC

조사회사의 생활은 어느 날은 고요했고, 어느 날은 폭풍처럼 정신없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엑셀과 씨름했고, 어떤 날은 보고서 한 문단을 고치기 위해 몇 시간을 모니터 앞에서 보내기도 했다. 패턴은 단조롭고 일은 반복적이었지만 후인의 마음속에는 이상한 감정이 자라고 있었다.

“이제 나는, 예전과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그 감정은 아직 아주 작았지만, 확실히 존재했다.

후인이 들어온 뒤 상민은 더 이상 그에게 노골적인 압박을 주지 않았다. 회의 날 벌어진 공동 책임 선언 이후 상민은 후인을 대하는 태도를 미묘하게 바꾸었다. 겉으로는 친절해졌고, 인사도 먼저 건넸고, 작은 칭찬도 흘렸다. 하지만 후인은 오래전부터 이런 전환을 경험해본 사람이었다. 그 변화는 존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단지 험하게 다뤘더니 생각보다 귀찮은 인물이라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사무실 내 약한 고리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신입 인턴 하나, 대리 하나, 말수가 적고 조용한 직원 하나. 상민의 화살은 가장 방어력이 약한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야, 이 문장은 왜 이렇게 어색해?”

“보고서 하나 쓰는 데 이걸 며칠이나 붙들고 있어?”

“아니, 이런 건 생각 좀 하고 가져오자고 했잖아.”


말투는 점점 더 거칠어졌고 지적의 톤도 무거워졌다. 후인은 멀리서 그 장면을 바라보며 어딘가 오싹한 감정을 느꼈다. ‘아… 이 구조, 너무 익숙하다.’ 자신이 공장에서 겪었던 장면. 회사에서 상사가 덮어씌우던 방식. 사람은 달라졌는데 행동 패턴은 그대로였다. 그리고 그 구조는 항상 같은 방식으로 돌아갔다.


누구를 칭찬할지 정하는 사람

누구를 책망할지 정하는 사람

희생자가 될 사람


그 자리는 정해져 있지 않았지만 절대 공석이 되는 일은 없었다. 언제나 누군가는 그 자리를 채웠다. 이번에는 희생자가 자신이 아니었다는 것만 다를 뿐이었다.


어느 날 퇴근 후, 사무실 불을 끄고 나오려던 순간이었다. 신입 인턴이 책상에 앉아 얼굴을 모니터에 묻은 채 조용히 울고 있었다.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가볍게 들썩이는 어깨와 키보드에 떨어지는 아주 작은 물방울 소리만이 공간을 흔들고 있었다. 후인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그저 지나쳤을 것이다.

‘저 사람도 버티겠지.’

‘다 겪는 과정이야.’

‘나도 견뎠으니까, 저 사람도 견디겠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선영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사람은요, 상처를 모른 척할 때 더 망가져요.”


후인은 조심스레 다가갔다.

“괜찮아요?”


인턴은 깜짝 놀라 얼굴을 들었다. 눈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빨갛게 부어 있었다.

“아… 아닙니다. 괜찮아요. 정말로… 괜찮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괜찮지 않을 때 하는 말이었다. 후인은 의자를 끌어당겨 살짝 거리를 유지하며 말했다.

“제가 처음 이 일을 할 때도 진짜 많이 울었어요.”


인턴이 멈칫했다.

“왜요… 선배님 같은 사람도요?”


후인은 웃었다.

“저 같은 사람이 가장 먼저 울죠. 이 일은 전문성보다 구박을 견디는 기술이 먼저 필요한 경우가 많으니까요.”

인턴의 입술이 떨렸다.

“저… 저 오늘 팀장님께 너무 심하게 혼났어요. 제가 못한 건 맞지만… 그… 좀 너무해서…”


그 말의 끝은 목 안에서 막혔다. 후인은 천천히 말했다.

“책임을 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여기서는 가장 쉬운 방식을 쓰고 있죠.”


인턴은 물었다.

“가장 쉬운 방식이요?”


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약한 사람부터 자르는 방식.”


침묵이 흐르고 인턴은 다시 눈을 떨궜다. 그 침묵 속에서 후인은 뼈아픈 진실 하나를 깨달았다.

“나는 이 구조에서 벗어났지만, 어떤 사람은 지금 처음으로 그 벽에 부딪히고 있다.”


마치 자신은 겨우 빠져나온 모기 떼 속에서 다른 누군가는 이제 막 처음 물리는 것처럼. 그 장면은 후인의 가슴 한가운데에 묵직한 돌처럼 내려앉았다. 며칠 뒤 사무실 회의에서 인턴의 이름이 슬쩍 언급됐다.

“그 친구 요즘 너무 느린데?”

“아직은 배울 때라서…”

“아니, 그 정도로 느리면 실무는 못 맡기지.”

“조금 더 지켜보죠.”


후인은 그 말에 아주 작은 어지럼증을 느꼈다. 단 몇 주 전 그 자리는 자기 자리였다. 그리고 단순히 책상 하나, 사람 하나를 바꾸기만 해도 그 자리는 완벽히 유지되었다. 희생양이라는 시스템의 자리는 항상 공석을 두지 않았다. 후인은 머릿속으로 천천히 문장을 떠올렸다.

“사람이 바뀌어도 자리는 그대로 남는다.”


그 문장은 그동안 자신이 겪은 모든 사건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얼마 뒤, 보고서 수정 과정에서 상민이 슬며시 말했다.

“후인씨, 인턴이 이번에 또 실수했더라고? 회신 메일에 파일 첨부도 안 하고. 참… 내가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말은 담담했지만 속뜻은 분명했다.

“너도 그 애가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해줘.”


예전이라면 후인은 상사의 말에 맞춰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네,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하네요.’

‘좀 더 교육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편이 조직에서는 훨씬 안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입술 끝에서 다른 문장이 슬며시 떠올랐다. 선영이 했던 말.

“사람이 진짜 타락하면, 자기가 한 짓을 떠올리지도 않아요.”


후인은 아주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그 친구가 못해서 실수한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상민의 눈썹이 움찔 올라갔다. 후인은 계속 말했다.

“요즘 팀장님이 지시하시는 양이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잖아요. 그 부담이 쌓이면…누구라도 실수할 것 같아요.”


침묵. 상민은 후인을 한참 바라보다 말없이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 침묵은 승복도 아니고, 분노도 아니었다. 단지 ‘이 사람…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네?’라는 놀라움이었다.


그날 밤 후인은 집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열지 않은 채 가만히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도 오늘 하루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내가… 달라졌구나.”


그 문장은 스스로도 낯설었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지만 선영과 나눈 대화, 인턴의 울음, 회의실에서의 선택들… 이 모든 것들이 후인을 천천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완전히 좋은 사람도 아니고 완전히 나쁜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타인의 고통을 이전보다 더 정확히 알고 자신의 행동이 남에게 어떤 파동을 남기는지 조금씩 생각할 수 있게 된 사람이었다. 그것이면 충분히 큰 변화였다.


이제는 모기소리가 나더라도 예전처럼 불을 켜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가장 조용한 새벽 공기 속에서 후인은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패턴은 남아도…사람은, 그래도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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