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패턴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인쇄소를 나온 뒤, 후인은 다시 무게감을 잃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번엔 예전처럼 어둡게 가라앉지는 않았다. 어딘가에 작은 불씨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그건 선영이 남긴 말 때문이었다.
“실수를 숨기느라 더 힘들어지는 거지, 실수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 문장은 옅은 위로처럼 남아 있었다. 덕분에 후인은 최소한 다음 걸음을 내딛을 힘을 얻었다.
새 직장은 공장도, 인쇄소도 아닌 그토록 돌아오고 싶었던 사무실이었다. 하지만 그 사무실을 처음 마주한 순간 후인은 기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벽은 희미하게 벗겨져 있었고 창문은 오래전부터 정확히 닦이지 않은 듯
빛이 고르게 들어오지 않았다. 책상은 모두 다른 색이었다. 누군가는 버리고 간 책상이, 누군가는 가져온 책상이, 모두 섞여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기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산만한 불안이 떠 있었다.
조사회사는 규모가 작았다. 사장은 실무를 거의 하지 않았고, 실질적인 운영은 팀장인 상민이 맡고 있었다. 후인이 처음 상민을 만났을 때, 그는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닳아 있었다. 오래 쓴 유리컵에 남은 얇은 잔금처럼 어딘가 표면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느낌.
“아, 후인씨 맞죠? 여기 앉으세요.”
말은 친절했지만 눈빛에는 상황 파악은 빨리 하시고요라는 압박이 깔려 있었다.
후인은 오래된 감각을 천천히 되살렸다. 문장을 정리하는 일, 숫자와 흐름을 맞추는 일, 그래프의 축을 고르고 색을 조정하는 일. 이 모든 건 그가 한때 잘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예전에는 내가 여기서 인정받아야 한다거나 누구보다 잘해야 한다는 압박이 앞서 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수련 후 복귀한 검술사처럼 손에 쥔 펜이 가볍게 느껴졌다.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된다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입사 후 첫 회식 자리. 작은 고깃집의 소란 속에서 상민은 소주잔을 돌리며 후인에게 말을 걸었다.
“자자, 후인씨. 여기서 첫 번째 규칙이 뭔지 알아요?”
후인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열심히 한다… 뭐 그런 건가요?”
상민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죠. ‘열심히 하는 척만 해라.’이게 첫 번째 규칙이에요.”
그 말은 농담처럼 들렸지만 표정은 진심이었다.
“왜냐면요, 진짜 열심히 하면 진짜로 다 시켜 먹습니다. 보고서? 기획? 현장조사? PT? 어휴… 죽어요, 진짜.”
그러면서 상민은 잔을 비웠다.
“우린 다 ‘먹고 살려고’ 일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진심 내지 말고 적당히 가야 오래 버틸 수 있는 거예요.”
후인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 또 시작이네.’
자신이 수없이 보아온 유형의 사람. 불합리함을 싫어하면서도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그 불합리함을 쉽게 흘려보내지 못하는 사람. 공장에서 함께 했던 룸메이트도, 신입을 괴롭히던 상사도 모두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었다. “약한 사람에게는 강하고 강한 사람 앞에서는 조용한 사람들.” 그 말이 머릿속에 스쳤다. 하지만 후인은 알았다. 예전의 자신이라면 이런 사람에게 쉽게 휘둘렸을 거라는 걸. 지금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둘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며칠 후 군청에서 최종 보고를 하는 날이었다. 보고서 파일은 정갈히 정리되어 있었지만 문제는 숫자였다. 한 공무원이 지적했다.
“여기… 만족도 항목 숫자가 우리 내부 자료랑 다른데요?”
순간 회의실 공기가 묘하게 바뀌었다. 그리고 상민이 아주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정확히 후인을 향해.
“후인씨, 이 부분… 당신이 최종 검수한 거 맞죠?”
순간 정적.
예전의 후인이라면 이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을 것이다.
‘아, 또다시 나를 희생양으로 쓰려 하는구나.’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엔 다르게 반응했다. 후인은 숨을 들이쉬고 담담하게 말했다.
“초안은 인턴이 입력했고 저는 문장과 배치를 다듬었습니다. 다만 최종 검수라는 건 팀장님과 제가 함께 책임지는 일입니다.”
상민의 표정이 멈췄다. 잠깐 들린 눈에 보이지 않는 틈. 그 틈은 단순한 당황이 아니라 “이 사람, 이런 식으로 나올 줄 몰랐는데?”라는 의미였다. 공무원은 예상보다 관대했다.
“실수야 누구나 하죠. 오늘 안에만 다시 보내주시면 됩니다.”
상민은 회의실을 나가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는 분노도, 당황도, 인정도 섞여 있었다. 후인은 알았다. 이제 그는 예전처럼 누군가의 잘못을 흘려보내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반대로 누구에게도 쉽게 죄를 뒤집어씌우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며칠 뒤 후인은 사무실에서 상민이 다른 직원에게 예전 자신이 당했던 방식 그대로 말을 쏟아내는 것을 보았다.
“그래프 폰트가 뭐 이래?”
“왜 이렇게 두루뭉술해?”
“야근 좀 하자니까 죽을 상을 하고 있어?”
후인은 그 장면을 보며 입술을 꼭 다물었다.
‘또 반복되는구나.’
구조는 변하지 않았다. 패턴도 그대로였다. 다만 이번엔 희생양이 자신이 아니었다. 예전의 후인이라면 안도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는 가만히 직원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말했다.
“괜찮아요. 처음엔 다 그러니까요. 제가 좀 같이 볼게요.”
그 말에 직원은 잠깐 멈칫하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민은 그 장면을 보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약한 자리에 있는 사람이 왜 또 다른 약자를 감싸는지. 그건 상민이 살아온 방식과 전혀 다른 세계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후인은 혼자 사무실에 남아 보고서를 정리하고 있었다. 형광등이 윙 하는 소리를 내고 밖은 이미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어딘가에서 모기 한 마리가 느릿하게 날아다니는 소리를 들었다.
에에에엥—
예전 같았으면 불을 켜고 손바닥을 날렸을 테지만 이번에는 그저 이렇게 말했다.
“가라. 오늘은 너 잡는다고 뭐가 변하진 않아.”
후인은 깨달았다. 모기는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불합리도, 권력도, 폭력도, 작은 악성 패턴도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모기가 있다고 해서 내가 모기가 될 필요는 없었다. 그 깨달음은 아주 잔잔했지만 확실한 변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