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반복을 넘어서는 법
겨울은 길었고, 조사회사의 프로젝트는 하나둘 끝나가고 있었다. 프로젝트가 끝난다는 건 회사에서 후인의 자리가 조용히 사라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후인은 이상하게 불안하지 않았다. 두려움 대신 어딘가 묵직한 평온이 있었다.
‘이번엔… 나를 버리지 않아도 되겠다.’
그 감각이 그의 마음 한가운데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퇴근 후 좁은 방에 누워 불을 끈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에에에엥—
익숙하고도 불쾌한 그 소리가 다시 귀 가까이에서 흔들렸다. 후인은 몸을 일으켰다. 예전 같았으면 반사적으로 불을 켜고 모기를 찾아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차분하게 앉아 소리를 들었다. 모기는 어둠 속을 자유롭게 날았다. 그리고 후인은 이상하게도 그 소리가 전처럼 공포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네가 계속 있었네.”
그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기의 습성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한 말이었다.
“네가 사라진 게 아니라 내가 그냥 네 소리에 도망치지 않았을 뿐이었어.”
후인의 몸이 천천히 풀렸다. 그는 갑자기 등 뒤에서야 이해되는 문장 하나를 떠올렸다.
“어떤 공포는, 대상이 아니라 기억 때문이다.”
그 모기가 더 이상 단순한 곤충이 아니란 걸 후인은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건 패턴이었다. 자신이 겪었던 폭력의 잔재였고, 평생 따라다니던 ‘지정된 약자’의 표식이었고, 어디에서도 자유롭지 않았던 시대의 메아리였다.
“모기는 사라지지 않아. 그냥… 이젠 나를 쫓아오지 못할 뿐이야.”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는 갑자기 노트북을 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이유 없이. 키보드를 두드리기 전 한참 동안 화면만 바라보았다. 빈 화면. 커서 깜빡임. 그 위에 얹히는 자신의 호흡. 그 순간 깨달았다.
‘난… 이제 도망치고 싶지 않구나.’
그는 타자를 쳤다.
“낭만의 시대는, 대체 누구에게 낭만이었을까.”
첫 문장을 쓰는 순간 후인의 심장 깊은 곳이 흔들렸다. 그 문장은 단순한 의견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시대 전체를 겨누는 말이었다. 그는 계속 썼다. 아버지가 담배를 피우며 밥상을 차지하던 장면. 상사가 자신의 얼굴을 비웃던 순간. 공장에서 누군가를 몰아세웠던 일. 누군가 부당하게 혼나던 장면을 외면했던 시간.
모든 장면이 타이핑 소리와 함께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후인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장면을 아무렇지 않은 일로 넘기려 했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은 알고 있었다. 그 모든 장면 속에는 구조와 인간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건… 내 이야기만이 아니구나.”
글을 적을수록 이 행위가 사실은 나에 대한 성찰이며, 자기 고백에 가깝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후인은 글의 중간에서 잠시 손을 멈췄다. 어떻게든 잊고 싶었던 장면 하나가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장에서 룸메이트를 신고했던 날. 그는 그날의 자신을 평생 변명해 왔다. 하지만 지금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린 상태에서 그 변명들은 너무 구차하게 느껴졌다. 그는 손이 떨리는 걸 느끼며 처음으로 솔직한 문장을 적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당했던 방식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칼을 겨눈 적이 있다.”
한 줄 문장이지만 후인은 마치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묘한 후련함을 느꼈다. 자신을 고백하는 일은 고통스럽지만 기묘하게도 자유로웠다. 마치 오래 숨겨온 어둠이 공기와 맞닿으며 색이 바래는 느낌이었다.
“나는… 모기를 미워하면서도 어느 순간 모기의 방식으로 살고 있었구나.”
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이 마치 방 안의 공기 분자 전체에 흘러 들어가는 것 같았다. 한 줄 한 줄 쓰다 보니 글은 어느새 개인의 회상에서 시대의 고백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폭력적 가부장제의 잔재, 회사에서의 위계적 언어, 공장에서의 약자 착취, 실수에 대한 구조적 고립, 희생양 메커니즘, 권력 없는 사람들의 반복되는 패턴 등등. 후인은 깨달았다.
‘내 삶은… 이 모든 것의 축소판이었구나.’
그 깨달음은 그에게 더 이상 피해자 혹은 가해자라는 좁은 정체성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보다 훨씬 넓은 시야에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구조의 희생자이기도 했지만, 구조를 재현한 가해자이기도 했다.”
그 고백은 평생 스스로에게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쓰는 순간 후인은 알았다. 그 순간이야말로 그가 오래 기다려온 해방의 첫 조각이라는 것을.
에에에엥—
어둠 속에서 모기가 다시 날았다. 하지만 이번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공포가 아니었다. 과거의 그림자가 아니라, 한 시대의 잔상 같았다. 모기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인은 변해 있었다. 그는 모기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너는 여전히 여기 있겠지. 하지만 나는 네 소리 때문에 더는 무너지지 않을 거야.”
그 말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선언이었다. 오랫동안 후인을 지배했던 공포, 구조가 주입한 무력감, 누군가에게서 강요받은 비난과 모욕…모든 것이 녹아내리듯 가볍게 떨어져 나갔다. 후인은 자신이 처음으로 무언가를 초월을 했다는 사실을 아주 조용히, 그러나 확실히 느꼈다. 초월은 거대한 결심이 아니라 단지 나는 이 방식으로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작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후인은 그 순간을 글로 기록함으로써 스스로를 구했다.
그날 새벽 그는 글의 마지막 문장을 적었다.
“나는 이제 누군가를 상하게 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고 싶다.”
문장을 입력하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빛이 더 들어온 것도 아니고, 온도가 변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후인의 마음속에서 어떤 묵직한 사슬 하나가 뚝하고 떨어져 나간 느낌이었다. 그는 알았다. 글쓰기는, 누구를 설득하거나 감동시키려고 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안에 눌러 넣은 세계를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는 작업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작업은 그를 살렸다.
동이 트자 방 안에 은은한 빛이 스며들었다. 후인은 모기를 찾지도, 불을 켜지도 않았다. 대신 창문을 조용히 열어 찬 바람을 들여보냈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후인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제 시작하자.”
겨울이 끝나고 있었다. 그리고 후인은 자기 인생의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