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11. 모기가 사라진 자리에서

by NaeilRnC

겨울은 끝나가고 있었다. 새벽공기 속에는 아직 차가운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숨을 들이쉬면 어딘가에서 포근한 향이 실려 오는 듯했다. 얼어붙었던 땅이 풀릴 때 나는 미세한 냄새, 물을 머금은 바람이 멀리서 불어오는 감촉. 어느 날 새벽, 후인은 습관처럼 잠에서 깼다. 그는 먼저 귀를 기울였다. 기계적으로, 반사적으로. 그러나 어느 방향에서도 예전처럼 귓속을 파고들던 날카로운 날갯짓은 들려오지 않았다.


고요.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불을 켜지 않은 채 낮게 깔린 새벽빛을 바라보았다. 모기가 없어진 것인지, 있지만 더 이상 들리지 않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후인은 그 차이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소리가 사라진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소리에 반응하던 자신의 마음이 달라졌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후인은 지난 몇 년 동안 모기처럼 살을 파고들던 존재들을 떠올렸다.


아버지의 무거운 손과 숨 막히던 권위. 직장에서 마주한 작은 폭군들의 비웃음. 계약서를 쥐고 있던 사람들의 무책임한 말투. 그리고 자신조차 놓치고 살았던, 약자에게 먼저 손이 가던 자신. 그 모든 것들이 한때는 방 안 가득 날아다니던 소음 같았다. 하지만 지금, 그 소음은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낡은 라디오처럼 흐릿한 음향으로 변해 있었다. 아직 세상 어딘가엔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후인의 귓가에서만큼은 더 이상 힘을 갖지 못하는 소리. 그는 조용히 생각했다.


“잡아 없애려고 했던 게 잘못이었구나.”


모기 소리는 인간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폭력도, 위선도, 누군가를 희생양 삼는 구조도. 하지만 그 소리에 휘둘리지 않으면 그것은 더 이상 ‘힘’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 후인은 오래도록 열지 않았던 상자를 꺼냈다. 과거 직장에서 받았던 문서, 소송 관련 서류, 정신없이 썼던 보고서 초안, 누군가에게 들었던 모욕적인 말들이 적힌 메모들.


그 모든 것들이 한때는 그의 삶의 무게를 지배했었다. 하지만 지금 바라보니 종이는 그저 종이였고 글자는 그저 글자였다. 그 안에서 뛰어다니던 두려움과 수치와 분노는 이미 오래전에 기운을 잃은 물감처럼 색이 바래 있었다.


후인은 천천히 그 종이들을 모아 서랍 속 깊숙한 곳에 넣었다. 불태워 없애는 게 아니라, 던져버리는 것도 아니라, 이제 너희는 여기 있어도 괜찮다는 태도로 조용히 밀어 넣었다. 그건 도망도, 거부도 아닌 자신만의 방식으로 과거와의 관계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창문을 열자 이른 아침의 바람이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차갑지만 아프지 않은 바람이었다. 후인은 몇 달 전, 추위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불을 켜고 모기만 쫓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는 세상의 모든 바람이 자신을 공격하는 것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바람이 새로 시작될 하루를 알려주는 예고편처럼 느껴졌다. 바람은 같았다. 달라진 건 바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책상 위에는 후인이 쓰고 있는 글이 놓여 있었다. 그 글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쓴 글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보고서 같은 글이었다.


‘지금까지 버티느라 수고했다.’

‘너는 충분히 사람이다.’

‘너도 사랑받아본 적 있어.’


그런 문장들이 마치 누군가 오래 알고 지낸 친구가 속삭이듯 적혀 있었다. 글은 후인의 마음 깊은 곳을 서서히 정리해주고 있었다. 세상은 쉽게 희망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글쓰기는 희망이 생길 수 있는 틈을 만든다. 그 틈이 후인을 살렸다.


후인은 창가에 놓인 작은 화분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선영이 건네준 작은 다육식물이었다.

“이건 물 자주 안 줘도 잘 자라요. 바쁜 사람한테 딱이죠.”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았다. 이 작은 식물은 그 어떤 조건에서도 자기 방식으로 버티고 자라나는 생명이었다. 누군가 밟아도 다시 올라오고, 햇빛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물이 많으면 많은 대로 스스로 균형을 맞추며 자라는 생명. 후인은 그 식물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나도… 이렇게 자란 걸까?’


오랜 상처, 반복된 패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고통 속에서도 후인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시 올라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자란 생명이었다. 해가 뜨기 시작했다.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빛이 방 안에 금빛 먼지를 흩뿌렸다. 후인은 눈을 감았다.


‘소리가 없다.’


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모기가 없는 아침은 누군가에겐 지극히 평범한 하루의 시작일 것이다. 하지만 후인에게는 몇 년 만에 찾아온 조용한 승리였다.


더 이상 모기를 쫓아내지 않아도 되는 아침.

더 이상 공격당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

더 이상 자신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삶.


그 모든 것들이 한 번의 큰 변화에서 온 것이 아니라 수없이 작은 변화들이 조용히 쌓여 이루어낸 결과였다. 그는 창문을 닫고 커피포트를 올렸다. 작고 소박한 아침의 소리들, 물이 데워지는 소리, 컵에 커피가 떨어지는 소리. 모기의 날갯짓과는 다른 온기가 담긴 소리들이었다. 그리고 후인은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괜찮아.”


그 말은 세상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오직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한 마디로 겨울은 완전히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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