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노동을 말하는 권력에 있다
배경 : 쿠팡의 새벽배송은 양날의 검이다. 누군가의 편의가 누군가에게는 죽음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가 어제오늘의 뉴스는 아니다. 새벽에 일하고 아침에 잠드는 사람들은 예전에도 늘 있었다. 그럼에도 다시 쟁점이 된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봤다. 오늘은 새벽배송의 그들, 새벽노동에 관한 이야기이다.
□ 달라진 것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을 조직하는 권력이다
새벽배송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가장 정교한 시간 재편 구조다. 소비자가 자는 동안 물건은 움직이고, 아침에 눈을 뜨면 만족이 배달되어 있다. 새벽배송은 밤새워 일하는 사람들의 존재를 감추는 완벽한 시스템이다. 소비자는 주문과 도착만 경험하지만, 그 사이 누군가의 노동은 지워진다. 나는 그 누군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다.
20대 시절, 구리농산물시장에서 야간 배송 아르바이트를 했다. 밤 10시에 출근해 주문서에 적힌 물건들을 손수레에 실어 트럭에 옮겼고, 아침 7시까지 물류센터와 매장을 돌며 물건을 내렸다. 물 먹은 시금치 한 가마니는 80kg이 넘었고, 겨울엔 손이 얼어 포대가 미끄러졌다. 그래도 그때는 서로 “고생 많았다”는 말 한마디에 버틸 수 있었다. 배송을 마치고 해장국 한 그릇에 소주 한 잔을 나누던 시절, 그 노동은 힘들었지만 땀 냄새보다 더 진하고 향긋한 사람 냄새가 났다. 하지만 지금의 새벽배송은 구조가 다르다.
과거의 새벽이 ‘시장과 생계의 순환’이었다면, 지금의 새벽은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통제’ 아래에 있다. 사람 대신 시스템이 일의 순서를 정하고, 인간의 휴식보다 고객의 ‘배송 완료 알림’이 더 중요해졌다. 노동은 관계가 아닌 명령이 되었고, 그 결과 새벽은 더 이상 근로자의 시간이 아니게 되었다.
□ 노조가 대변하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누구의 이해관계’인가?
사회학에서 노조는 노동자의 계급적 이해를 조직화하는 주체라는 점에서 본래 정치행위자다. 그러나 현실의 노조는 노동계급 전체를 대표하지 못하고 특정 조직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경우가 많다. 천안 자동차부품 공장에서 내가 본 노조는 근로자들의 방파제가 아니라 현장을 감시하는 또 하나의 권력이었다. 그들은 ‘노동자 전체’를 말했지만 실제로는 조직 내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이번 새벽배송 논란에서 초심야 시간대(0시~5시) 배송 제한을 요구하고 있는 전국택배노동조합(택배노조)은 우정사업본부, CJ, 로젠, 롯데, 한진 등 주로 반(反) 쿠팡계 기업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작 쿠팡 새벽배송 노동자들은 별도의 고용 구조 속에 있다.
반면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국물류센터지부는 쿠팡의 노동자들도 포함되어 있지만, 택배기사를 위한 노조라고 하기에는 결이 다르다. 이들은 새벽배송 자체를 위험한 산업구조로 규정하며 시스템 전면 중단과 구조 개편을 주장한다.
한쪽은 속도 완화를, 다른 한쪽은 시스템 폐지를 말하고 있지만 그 어디에도 현장 노동자의 실제 목소리가 담겨 있지 않다. 애초에 쿠팡의 배송기사들은 전통적 노조 구조에 편입되지 않는 비정형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배송기사가 물류작업까지 참여해야 하느냐'이지만 이게 쟁점이 되면 택배노조는 쿠팡의 질주를 견제할 수 없고, 물류센터지부는 자신들의 기반인 물류노동자들에게 등을 돌려야 하기 때문에 결국 또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배송기사들이 제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시작은 새벽배송이었지만, 결국 노조와 기업·정치조직이 대립하는 산업정치의 장으로 변질된 현실에 가장 어울리는 말은 "노동은 정작 그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이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직접적인 생계가 달려있기 때문에 그들의 불만은 "그럼 다른 일을 알아보라"는 간단한 답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 노회찬이 남긴 것은 구호가 아니라 ‘노동을 이해하는 정치’였다
노회찬은 노동을 ‘정치적 자원’이 아니라 정치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인물이다. 그는 플랫폼 시대 이전부터 비정형 노동, 하청구조, 특수고용 노동의 취약성을 계급적·구조적 시각으로 파악했던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그의 말 “노동은 사람의 얼굴을 가져야 한다”는 단순한 휴머니즘이 아니라 사회학적 선언에 가깝다.
그 말은 노동의 위기가 어느 개인이나 기업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노동을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구조적 조건 때문이라는 분석적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새벽노동이 위험한 이유도 같다. 노동자의 얼굴이 지워진 것이 아니라 노동의 얼굴을 지우는 구조가 강화된 것이다. 노조는 이 구조를 바꾸기보다 기득권 조직의 경계선을 그리며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정치는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리듬을 보존하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와 노조 모두 노동의 리듬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의 리듬을 우선하고 있다. 새벽배송을 폐지하자는 논리도 그 산업을 유지하자는 논리도 모두 정치적 이해관계의 언어다. 하지만 새벽노동은 그 이전부터 이어져온 한국 산업구조의 핵심 기반이었다.
정의는 산업을 마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인간의 삶을 보호하는 데 있다. 노동의 문제는 노동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노동을 관리하는 권력의 문제이며, 그 권력이 누구의 목소리를 듣느냐의 문제다.
우리가 양날의 검에 손을 베이지 않으려면 노동자에게 안전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노동을 둘러싼 권력의 구조를 먼저 바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