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재 중 곡리 01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등 Oct 05. 2024

<소설> 곡리 1

<곡리 1>


비명 소리를 듣고 공장 안으로 뛰어들었을 때, 퐁샤는 주저앉은 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가락을 쥐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손을 뒤로 감추며 “싸장님 내 잘못 아니야.” 검게 질린 입술을 떨며 말했다. 황반장이 임시 처치할 구급상자를 들고 허둥지둥 공장 안으로 들고 왔고, 오대리는 잘린 손가락을 찾아 비닐봉지에 넣었다. 나는 정신없이 퐁샤를 차 안으로 밀어 넣으며 황반장에게 무엇이라고 소리쳤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시간은 소리가 사라진 화면처럼 머릿속에 누군가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잔영만 남아있다. 차에 올라탄 퐁샤가 다시 “싸장님 내 잘못 아니야.”라고 말했을 때, “알아.”나는 겨우 짤막하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IMF는 생각보다 더 잔혹했다. 공단에 있던 공장들이 도미노처럼 문을 닫았다. 그날은 마지막 어음이 돌아오는 날이었고, 직원들 월급날이었다. 오랜 망설임 끝에 K와 통화하면서 곧 부도가 날 것이라고 알린 직후였다. 퐁샤가 수술을 받는 동안 시계를 보았다. 은행 마감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하청업체인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연쇄부도였으니까. 손가락이 잘린 건 퐁샤의 말대로 퐁샤의 잘못이 아닐지 모른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떠올랐다. “제 잘못이 아닙니다.” 뫼르소도 그랬다. 그건 사실이다. 어머니 죽음이 뫼르소의 잘못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아랍인을 살해한 동기가 태양 때문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아니, 그것도 사실일지 모른다. 그 시간에 나는 뜬금없이 머릿속으로 뫼르소와 싸우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정신상태가 되었는지 모른다. 다시 전화가 온 K에게는 그저 응응 거리다 끊었다. 곧 닥칠 나의 파산도 내 잘못이 아닐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처지가 아니었다. 잘못이거나 잘못이 아니거나 책임은 끈질기게 들어붙어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나는 퐁샤의 손가락을 제자리에 붙이는데 얼마 안 남은 돈을 모조리 쓰면서 업무를 마무리했다. 


그 후 회오리처럼 시간은 휩쓸려 갔다. 7월 폭우가 쏟아지던 새벽 세 시, 자고 있는 딸을 깨워 차에 태웠다. 처음으로 동반 자살을 생각했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갖고 있지 않았다. 딸이 태어난 날, 나는 K에게 우리나라 모든 일간지를 구입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딸에게 꽤나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딸이 태어난 날은 신문마다 김만철 일가 귀순 사건을 다루었다. 그는 "저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서, 자유스럽게 살기 위해 떠났다"라고 말해 큰 화제를 모았었다. 나는 문득 뒷좌석에서 다시 잠이 든 딸을 보면서 남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따뜻한 남쪽이 죽기에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빗줄기가 어둠 속에서 내리꽂고 있었다.


“난 죽고 싶지 않아.”

자는 줄 알았던 딸이 대충 내뱉는 투로 말했다.

“알아.”

안다는 것은 슬픈 일이었다. 알기 때문에 명백하게 내 잘못만 남았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죽지 못했다. 죽을 계획이라는 것이 너무 어설픈 탓이었다.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숙소를 정한 뒤, 타고 내려온 차를 중고매매 광고지에 올리는 일이었다. 고맙게도 차는 괜찮은 가격에 팔렸다.


다시 구입한 자동차는 르망이었고 40만 원에 구입했으므로 이름을 '사십만'이라고 지었다. 사십만은 잘 구슬려야 굴러가는 차였다. 마을 표지석에 <곡리>라는 글자가 굵고 검게 궁서체로 박혀있었다. 표지석 아래 개천을 따라 10월 쑥부쟁이가 무더기로 피어 있었다.  



토요일 연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