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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등 Nov 06. 2024

백지 안녕

(당신을 보내며)


아침에 안개가 짙었습니다.

문득 강가로 나가 사진 몇 장을 찍게 되었습니다.

사실 안개는 

보이던 것을 가리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았던 것을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당신이 가고, 나는 더 많이 당신에 대해 느꼈으며 더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상복을 입은 딸이 영정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딸은 나에게 상복을 주지 않았습니다.

딸은 입관식에서도 마지막 당신의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엄마, 보지 마. 멀리 가있어. 멀리.

입관식은 딸 혼자 치렀습니다.

당신을 보내는 모든 의식을 딸 혼자 해냈습니다.

나는 죽은 듯이 딸 뒤에 서있을 뿐이었습니다.

딸은 당신을 빼다 닮았습니다.

어쩌면 그리 냉정하면서도 야무지게 장례를 혼자 치러내는지

아픔을 온몸에 가시처럼 박고 당신처럼 웃어댔습니다.

나는 그런 딸이 늘 걱정입니다.

딸은 그렇게 간 당신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고집을 그대로 닮았으니까요.


영정 앞에서 긴 밤을 지새울 때, 나는 딸에게 타로를 펼쳐 보였습니다.

딸이 물끄러미 나를 봅니다.

아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지금은 어떻게 있냐고 딸이 물었습니다.

백지 카드가 나왔습니다. 

無로 돌아갔다고 고통이 사라지고 공기처럼 가볍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돌아가실 때 무슨 마음이었냐고 딸이 또 물었습니다.

놀랍게도 다시 백지 카드가 나왔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았대. 맺혔던 것은 모두 풀어놓았다고 말해주었습니다.

휴대폰 비밀 번호는 왜 잠가놨냐고 딸이 다시 물었습니다.

믿지 않겠지만 다시 백지 카드가 나왔습니다. 그날 백지 카드는 모두 일곱 번이나 나왔습니다.

누구에게도 알리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 같아. 조용히 혼자 가고 싶었나 봐.

딸과 나는 밤새 당신의 마음을 두고 타로를 보았습니다.

때로 '아빠는 참 바보였어.'하고 딸이 말했습니다.

하지만 딸에게 하지 못한 말도 있었습니다.

백지에 깊게 박혀있는 미안하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아직도 사무치게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것을 당신의 마음이라고 읽었습니다.

미안할 때 미안하다고 말을 못 하고

사랑할 때 사랑한다고 말을 못 한 것이 당신의 잘못은 아닐진대

나와 세상이 당신에게 너무 잔인했습니다.

딸은 평소 당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장례식장에 장식해 놨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왔었다는 것을 사진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사슴눈처럼 참 예뻤던 당신의 눈이 점차 나이가 드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렇게 살았었구나. 눈에 슬픔을 가득 담고 견디며 살았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딸은 당신의 유언을 들어주지 않을 작정인 듯했습니다.

기어이 장례식을 치러냈고 

당신을 꽃으로 아름답게 꾸며서 리무진에 태워 보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빠가 '숲 속에 잠자는 공주 됐네'라며 환하게 웃었습니다.


소설 곡리는 이제 겨우 3회분을 썼는데

그것이 잘못이었을까요.

당신은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나는 곡리에서의 내 삶이 얼마나 햇살 가득했는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웃음과 따스함을 쓰려고 했던 것입니다.

인생은 반전 투성이라고 말하려 했던 것입니다.

당신은 마지막까지 바라봐줄 용기가 없었나 봅니다.

꽃은 자세히 보아야 아름답다고 시인이 말했습니다.

누군가의 인생은 끝까지 바라봐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해 줄 걸 그랬습니다.

당신

오늘 아침에는 당신의 마음을 물으며 카드 하나를 뽑아봅니다.

역시 백지가 나옵니다.

그럼 안녕.이라고 읽습니다.

이십 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하지 못했던 말을 이제야 합니다.

그럼 안녕, 잘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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