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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숲song 꽃song Dec 20. 2024

동차이몽(同車異夢 )

『옆집 엄마는 무슨 재미로 사나?』에서는 옆집 엄마(숲 song 꽃 song)가 마흔 즈음에 써 둔 습작글 중에서 누구에게나 있지만, 누구에게도 없는 일상이야기를 하나씩 꺼내어 연재합니다. 담장너머 옆집 엄마네 살아가는 이야기 속에서 작은 웃음, 조그마한 삶의 팁이라도 챙겨가실 것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거예요.



 바야흐로 단풍철이다. 한껏 치장한 가을 산과 들판이 일상에 코를 꿰어 살아가는 우리들의 시선을 꽉 잡고 좀처럼 놓아주지 않는다. 마음의 빗장을 여간 단단히 여며놓고 사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처럼 황홀한 가을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대목을 맞은 여행사들은 밀려오는 관광객들을 산으로 들로 실어 나르느라, 숨 돌릴 새 없이 즐거운 비명을 지르리라. IMF이후 잠시 뜸하다 싶더니, 여행업계의 짭짤한 수입과 일상생활에 싫증난 중년층의 욕구가 맞아떨어져 버젓이 여행상품으로 자리 잡고 있는 '묻지 마 관광'이 요즘 다시 늘고 있다고 한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명산대천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밀려드는 관광차량 속에는 또 얼마나 많은 '묻지 마 관광류'의 차량들이 섞여 있을까? 또다시 단풍철이 돌아오니, 몇 년 전 결국 웃지 못할 희극으로 끝나고 만 여자들만의 만추여행이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개교기념일을 맞아, 여교사들끼리 남해금산으로 가을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이날만큼은 직장업무와 살림과 육아 모두 떨쳐버리고 큰맘 먹고 훌훌 떠나보기로 한 것이다. 비록 하루에 불과했지만, 잃어버린 청춘의 자유와 낭만을 다시 되찾아 줄지도 모를 여행에 대한 기대로 며칠밤 레어 잠을 설쳤다.  

 오감만족 여행을 위해 여행분위기에 꼭 맞는 시 몇 편을 중하게 라 여행자료를 만들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 선곡에 선곡을 거듭한 끝에 만추여행용 노래테이프까지 완성했다. '그 노래를 함께 들으면서 우리들의 마음은 섬진강 은빛 물결처럼 반짝반짝 빛나겠지!' 하고 행복한 상상을 했다. 준비하느라 밤을 꼬박 새웠어도 몸과 마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버스 한 대를 이용하기에는 숫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목적의 다른 여자 일행과 함께 버스 한 대에 동승하기로 여행사와 계약했다.

 드디어 여행 날 아침, 일찍 나와 미리 버스에 올라타 있던 우리는, 하나 둘 올라오는 다른 일행을 맞이하면서부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여자 셋에 열댓 명의 건장한 중년 남성들. 그리고 바리바리 올라오는 음식들과 맥주박스. 여행사의 약속과는 분명히 다른 분위기의 모습들이었다.

  여행기분에 들떠있던 나는 어쨌거나 밤새 만들어 놓은 자료를 동행할 다른 일행들에게도 나눠주고 다녔다. 그리고 완벽하게 편집한 만추여행용 노래테이프를 기사에게 건네며, 버스가 출발하면 틀어 달라고 자랑스럽게 부탁했다.

 처음 여행자료를 나눠주었을 때 알아챘어야 했다. "뭐 이런 것까지 준비했어요?"라고 반문하던 그 말의 의미를.


 차 안의 공기가 서로 겉도는 것 같고 조금 어색한 분위기였지만, 누가 먼저 나서서 이렇고 저렇고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우리는 여행사와 우리 사이를 주선해 주었던 선생님을 철썩 같이 믿고 있었고, 일행 중 누구도 들떠있는 여행기분에 찬물을 끼얹고 싶은 사람은 없었으니까.

 도시를 벗어나자 기다렸다는 듯 반겨주는 가을 풍경들은 메말랐던 마음에 서서히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오감을 열어 놓고 자신과 오롯이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듯싶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가을에 어울리는 노래로 기분을 한껏 고조시키는 위력을 발휘하던 나의 테이프가 갑자기 요란한 뽕짝 메들리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와 때를 맞추기라도 한 듯 다른 팀의 중년 남자 한 분이 벌떡 일어나더니, 차 안에 어색하게 흐르던 공기를 썰렁하게 바꾸어 놓았다. 그날 우리 일행 중에는 보디가드를 자청하여 따라온 젊은 남자 선생님이 한 명 있었다.

 다른 팀의 대표쯤 되어 보이던 남자분은 난데없이 그를 가리키며 "저 남자는 누구냐? 기분 나쁘게 신경 쓰인다." 며 큰소리로 따지듯 물었다.

  
우리 일행은 그 말이 무슨 뜻인 줄 몰라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제일 먼저 상황을 파악하신 맏언니가 나서서, 자못 살벌해진 분위기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여행사에서 착각을 했나 보다. 우리는 순수하게 여행을 하러 온 교사들이다. 우리도 지금 이 상황이 굉장히 당황스럽다. 일이 어찌해서 이렇게 꼬이게 된 건지 속상하다."며 최대한 감정의 동요 없이 우리 일행의 입장을 전하였다.


 얘기를 듣고 난 그쪽의 반응은 '혹시나' 했던 일이 '역시나' 였다는 듯 모처럼 돈들이고 시간 내어 기분만 잡쳤다는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왜 또 선생이냐?"며 불쾌하게 투덜댔다.



 그쪽 팀은 모 단체회원들로 모처럼 화끈하게 놀아보고자 '묻지 마 관광을 계획했던 모양이었다. 즐거운 하루를 위해 갖가지 음식을 준비하고 여자들 몫까지 경비를 충당하기로 했다는 그들의 사정도 안 됐지만, 모처럼 모든 일 다 접어두고 떠나 온 우리들의 산산조각 난 가을 여행은 또 어쩌란 말인가? 두 마리 토끼를 다 놓치지 않으려는 여행사의 횡포가 만들어 낸 '여행'과 '묻지 마 관광'이라는 '동차이몽(同車異夢)의 자리에 더 이상 유쾌한 가을 낭만은 없었다. 그냥 포기하기에는 너무 억울했던 우리들은 오기로 '동차이몽'(同車異夢)의 불편함을 감수해 내며 마지막까지 우리가 계획한 여행일정을 마쳤다. 무수한 에피소드를 남기며 웃지 못할 희극으로 막을 내린 그 해 가을 여행은, 소중한 여가마저 물질만능주의와 쾌락지향의 즉흥문화로 변해가는 현대사회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20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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