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BTS노래도 아니고 군가를 부르고 있는 모녀라니
"오늘 보급품 받았어요. 하... 이거 언제 정리하지? 이름표도 다 달아야 하는데.. 휴우"
처음 보급품을 지급받은 날 더블백(공식명칭 : 의류대)에 보급품을 잔뜩 받아서 낑낑거리면서 들고 왔다. 품목수도 많아져서 체육복도 겨울, 봄가을, 여름용이 다 따로 있고, 반팔티, 긴팔티, 전투복, 전투화, 구두, 단복(하계, 동계), 007 가방, 전투화용 양말, 구두용 양말, 모자, 장갑 이것저것 받아와서는 방에 펼쳐놓고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를 몰라서 넋을 놓고 앉아있었다. 서랍 2칸을 비워서 군대용품 전용칸으로 만들고 같이 정리해 주었다. 공군은 하늘을 상징하는 파란색이 꼭 포함되어 있어 더 발랄하고 청량한 느낌이 들었다.
딸이 학군장교 후보생이 되고 나서 집에는 전투복과 전투화를 비롯해서 군인용품이 산더미같이 쌓여갔다. 나의 긴긴 군생활을 보여주는 것들이 넘치는데 파란색 공군 표식이 잔뜩 붙어있는 전투복과 AIRFORCE가 새겨진 티셔츠들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토막상식으로 육군은 수풀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를 주로 사용한다. 공군은 파란색, 해군은 흰색, 해병대는 빨간색을 주로 사용한다. 각자 영문으로는 ARMY, AIRFORCE, NAVY, MARIN이다.
주로 각 군으로 입대하면 각 군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타 군이 어떻게 생활하는지는 합동부대에서 근무하지 않는 한 알 수가 없다. 육군으로 오랜 시간 근무하면서도 타군과 함께 근무를 할 기회가 없었다. 딸이 공군 학군장교가 되면서 공군의 생활에 대해서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육군의 눈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신기한 세계였다. 그중에서 '성적순 부대 선택권 부여'라는 것이 가장 신기했다.
공군은 참 합리적이면서 무섭다. 교육 성적순으로 부대를 선택할 수 있다. 아... 진짜 무섭다. 교육 성적이 좋으면 선택의 우선권을 갖는다. 어찌 보면 합리적이고 한편으로는 좀 가혹한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성적순이니까 공정하다. 능력을 우선으로 생각한다는 뜻인데 어떤 기준으로 선택되는지를 모르는 깜깜이 배치보다는 훨씬 공정하다고 생각된다. 육군은 워낙 부대수도 많고 전국에 광범위하게 퍼져있어서 소위들은 어느 지역에 배치될지 예측할 수가 없다. 성적을 잘 받아야 하는 명확한 이유도 생기니까 열심히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는 강원도 화천에서 군생활을 시작했는데 부산이 고향인 내가 화천이라는 깊은 산속 낯선 땅에서 혼자 덩그러니 살아가게 될 거라고 진짜로 상상도 못 했었다. 춘천에서 화천으로 넘어가는 파로호 둘레길을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지나갈 때 등골이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성적순으로 부대를 선택할 수 있었다면 부산에 있는 부대를 선택했을까? 그럼 동상은 안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딸에게도 기왕에 시작하기로 한 거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받고 꼭 원하는 부대로 가라고 당부의 말을 했다.
그렇게 받아들임의 시간이 시작되었지만 딸이면서 군대 후배가 될 여학생 한 명이 생기면서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나고 있었다. 차라리 군대에 대해 전혀 모르는 엄마가 나았을까? 아는 게 병이라고 하나부터 열까지 아니 백까지 너무 잘 예측이 되고 그 예측이 하나도 빗나가지 않는 딸의 학군장교 생활은 부대에서만 군인이고자 노력했던 나를 집에서도 군인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런 엄마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는 딸은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다가와 말했다.
"오늘 학군단에서 처음 군가 배우고 제식훈련했는데 잘 모르겠더라고요"
"왜? 왜 모르는데? 배웠다면서"
"그게 너무 짧게 배웠는데 일단 연습해 오라고 했어요"
"그래? 한번 해 봐"
"지금? 해보라고요?"
"응, 뭐가 어려운지 너 하는 거 보면 엄마가 알지. 엄마가 알려줄게"
"오오, 그럴 수도 있구나. 나는 엄마는 그런 거 모르는 줄 알았어요"
"저기요, 엄마가 너 태어나기 전부터 군인이었다는 거 잊으셨나 봐요?"
"그렇군요. 알겠어요. 자 한번 봐요. 잘 되려나 모르겠네"
딸은 혼자서 '뒤로 돌아'하면서 뒤로 돌다가 휘청휘청 거린다. 그 목소리가 꼭 유치원생 정도의 어린이가 말하는 것 같아서 너무 웃겼다. 딸은 목소리가 좀 아기 같아서 요즘도 통화음이 새어나가면 초등학생이냐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딱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아... 저런 목소리로 구령 붙이면 교관들한테 야단맞을 것 같은데 저 목소리를 어쩌나... 팔다리는 왜 저렇게 자유롭게 움직이지? 하긴 처음 배우는데 몸에 잘 익지 않아서 그렇겠지? '차렷' '열중쉬어' 혼자 하는 복습이 몇 차례 계속되었다.
"알겠어. 그럼 군가는? 군가는 뭘 배웠는데?"
"아.. 진짜 사나이랑, 또 뭐였더라? 기억이 잘 안나네"
음... 이런 아이들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 거지? 나는 딸의 학습에 깊이 개입한 적이 없다. 연필 잡는 방법, 가나다라, 1234 쓰는 법, 구구단 외우는 법 처음은 할머니가 가르쳤고 더 어려운 건 학교에서 선생님들께 배웠다. 영어는... 신기한 영어나라 학습지 선생님과 학원 선생님들이 가르쳤다. 나는 주로 노는 것만 가르친 것 같은데... 갑자기 군가와 제식 교육이라니... 이런 이상하고 기묘한 가정교육을 굳이 해달라고 요청도 없었는데 나서서 하고 있는 것이 너무 웃겼다.
제식동작은 앞으로 가! 뒤로 돌아! 좌향좌! 우향우! 이런 것들이다. 군인으로서 곧은 자세를 갖추고 병력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기 위한 기초 중의 기초 교육이다. 의외로 구령소리를 잘 못 듣고 혼자 다른 방향으로 돌거나 오른발 오른손을 같이 들고 당당히 걷거나 뒤로 돌면서 중심을 못 잡아서 휘청거리는 장병들이 많다. 군가는 요즘 신세대 군가가 많이 나왔지만 교육받을 때는 핵심군가(진짜사나이, 아리랑겨레 등)를 먼저 배운다.
내가 그래도 군인 엄마인데 내 딸이 군대 교관들한테 지적을 받거나 야단맞으면 굉장히 기분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굳이 나서본다. "잘 봐. 뒤로 돌아할 때는 배랑 허리에 힘을 딱 주고 팽이 돌듯이 샥 돌아야 해. 주먹은 계란 하나 잡고 있다 생각할 정도로 말아 쥐고 다 돌고 나서는 바지 옆선에 엄지손가락이 닿는다 생각하고 주먹을 붙이면 돼" 이런 자세한 설명과 함께 딸 앞에서 제식시범을 종류별로 다 보여주었다. 딸은 처음 보는 엄마의 절도 있는 모습에 감탄사를 내뱉으며 물개박수를 보내왔다. 이게 뭐라고 어깨가 으쓱해진다.
"자! 이제 다시 해 보시죠?"
"네! 도전!"
"뒤로 돌아!"
딸이 뒤로 돌아 구령에 맞추어서 뒤로 돌다가 휘청거린다. 아! 내 딸도 그런 아이였구나 중심 못 잡고 비틀거려서 교관에게 핀잔 듣는.. 갑자기 의지가 더 활활 불타올랐다.
"아니, 아니지, 허리를 곧게 펴고 시선은 전방 15도 방향을 보고 팔은 붙이고 허벅지, 배에 힘을 딱 주고!"
"다시 보여줄게 잘 봐!"
"오오~~, 엄마는 진짜 잘하네요. 난 왜 잘 안되지?"
"연습해야지 뭐, 엄마가 그거 잘하는 거는 너무 당연한 거구"
군가는 그냥 유튜브에서 찾아서 들으라고 하면 되었을 텐데 "잘 들어봐!" 하면서 군가를 목청 높여 불러 보았다. 집에서 군가를 부르게 될 줄이야.... 오랜만에 불러보는 군가에 나도 모르게 신이 났다. 손장단을 맞춰가면서 팔을 힘차게 흔들어 가면서 신나게 군가를 불러보았다.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군가는 푸른 소나무야! 힘들 때 그 군가를 부르면 힘이 났었거든. 지금은 군가를 부를 일도 거의 없지만 너도 좋아하는 군가가 하나 생기면 아이유(딸은 아이유 팬이다) 노래를 부를 때 보다 더 위로가 되는 날도 있을 거야."
이 강산은 내가 지키노라 당신의 그 충정
하늘 보며 힘껏 흔들었던 평화의 깃발
아아~ 다시 선 이 땅에 당신 닮은 푸른 소나무
딸도 옆에서 흥얼흥얼 손장단을 맞춰주었다. 실컷 군가를 부르고 구령을 붙이고 같이 앞으로 가! 뒤로 돌아! 하다가 둘이 눈이 마주쳤다.
"아~~ 여기는 어디인가요?"
"우리 지금 달밤에 거실에서 뭐 하는 거지?" 하면서 배꼽이 빠져라 웃었다.
그렇게 군인 엄마와 군인이 될 딸의 하루가 저물어갔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서 눈물을 많이 흘렸다. 군대 안에서도 오늘처럼 재미있게 그 생활을 즐기면서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마음이 황량하지 않게 살았으면 좋겠다. 마음을 내려놓아도 내려놓아도 다 내려놓을 수 없는 그 구멍에 또 바람이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딸이 경험할 군대 안에서의 세상은 내가 겪은 세상과는 다를 것임을 알지만 그래도 군대 속인데 싶어서 또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