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때나 회사에서 제법 많은 프레젠테이션을 했다는 사람들도 "쉬운 프레젠테이션은 없다"라고 얘기한다. 특히, 70~8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기성세대(낀세대 포함)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람들 있는 곳에서 앞에 나가 생각을 말하라'라는 발표 환경은 정말 익숙한 환경이 아니다.
2000년대 학창 시절을 보낸 젊은 세대들은 그나마 좀 나은 편이다. 최소한 그들은 학창 시절에 발표수업이나, 자신의 의견 말하기 등, 눌변가나 달변가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조금은 익숙하다.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면서 파워포인트 작성하다 보면, 페이지마다 내용을 웅얼웅얼 거리기도 하고, '이 부분에서 이렇게 얘기해야지' 하는 생각도 들게 된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파워포인트라고 하는 이 훌륭한 오피스 프로그램은 화면 하단에 스크립트를 작성할 수 있는 별도의 칸을 제공하고, 그 공간에 우리는 또다시 '매우 쳐라'모드로 돌변하여 키보드를 두드린다.
처음에는 간단하게 내가 기억해야 하는 핵심 문구나 페이지네이셔닝을 하면서 꼭 필요한 말들을 적기 시작한다. 하지만, 곧 그 시작의 창대함은 긴 소설로 완성된다. 파워포인트를 완성하고 연습을 할 때면, 파워포인트 내용을 출력한 A4 종이뭉치를 들고는 매 페이지마다 종이를 쳐다보고 그 내용을 읽기 시작한다. 마치 연습의 목적이 드라마 촬영 전에 대본을 외우듯이 말이다. 배우는 짤막짤막한 촬영을 위해 대본을 보면서 외우지만, 결국은 대본 속 상황을 숙지하고 겉으로 보이는 환경 속에 빠져들기 위해 계속 동작과 표정 등을 연습한다. 하지만 우리는 가상의 청중을 예상하여 아이컨텍을 하거나, 페이지에 손을 뻗어 가리키고 무대에서 이동 동선을 체크하는 등의 액션은 연습하기 어렵다. 결국 연습은 대본 외우기가 되는 셈이다.
대본은 프레젠테이션에 대한 두려움을 안정감으로 바꾸어준다.
사실, '스크립트는 써도 되지 않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스크립트라고 대본과 다르지 않다. 결국 영어와 우리말의 같은 단어를 쓰면서 대본에서 문장형태의 구조를 빼고는 '스크립트'라고 보여주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오래전에 oo중공업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였다.
당시 두 개의 프로젝트 입찰을 하루에 할 때이다 보니, 시간을 나누어 1차는 오후 1시에, 2차는 오후 3시에 진행을 하게 되었다. 만족스럽게 1차 프레젠테이션을 마치고 함께 참석한 스텝들과 커피 한잔의 여유를 가지며 제안서를 간간히 보며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 1차 때와 큰 핵심만 다를 뿐 앞뒤에 넣어 놓은 회사 소개 및 분위기 형성(라포 형성)을 위한 가벼운 농담과 화제의 멘트가 같았기에 큰 어려움을 예상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1차 발표에 대한 만족감이 높아, 이로 인해 약간 여유도 있었다.
2차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회의실로 들어갔을 때, 나는 큰 멘붕(?)을 겪고 말았다.
1차 때와 다른 청중들이 앉아 있을 거라고 예상하였으나, 2차 프레젠테이션 청중은 1차 때와 동일한 사람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예능감이나 코미디 기술을 가지고 있는 연기자라도, 같은 사람들 앞에서 앞서 했던 인사말이나 유머 코드를 반복하여 두 번 웃길 수 있을까?
생각지 못한 변수로 인해서 2차 프레젠테이션은 보기 좋게 망치고 말았다.
1차 때 사용했던 멘트들을 구사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하니 머릿속은 복잡해졌고, 스크립트에 있는 내용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애드리브도 생기지 않았다. 이렇듯, 대본(스크립트)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주지만, 달라진 환경에 대한 대응을 원천 봉쇄해 버린다.
환경은 항상 바뀐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다르듯,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날의 컨디션이 다르고, 오전 출근 대중교통 안에서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에도 그날의 감정 변화는 일어난다. 그러기에 우리는 온갖 수십 개의 가능성을 줄 세워놓고 머릿속에서 상황을 상상해야 한다.
가뜩이나 상상해야 하는 상황은 많고, 내가 예상한 상황이 실현되리라는 가능성도 적은데, 대본까지 달달 외우게 되면 그나마 가지고 있던 대본으로 인한 안정감이 두려움으로 변화되어 머릿속이 하얘지는 '멘붕'에 '꼼짝 마'상황을 맞게 되는 것이다.
파워포인트의 매 페이지마다 꺼내어 써봐야 하는 건 대본이 아니라, 키워드나 메시지다. 문장형의 대본이 아닌 단어 형태의 키워드나 핵심 메시지만 기억하고 있다면, 현장 상황이 어떻게 달라지더라도 프레젠테이션은 내가 주도하면서 꼭 해야만 하는 그 '한마디'를 할 수 있다. 안정감을 버리고 대응력을 선택하는 것이다. 대본으로 인한 안정감은 핵심 메시지를 이용한 반복적인 연습으로 충분히 커버 가능하다.
우지은의 '스피치 시크릿' 65p.
프레젠테이션을 스피치의 한 범주로 본다면, 스피치에서 얘기하는 핵심 키워드를 통한 내용 전개(위 사진 설명) 방법과 맥락이 같다. 한 편의 소설이 아닌 핵심 키워드를 탄탄하고 짜임새 있게 정리할 수 있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같은 청중들을 앞에 두고,
"회사 소개는 앞에서 익히 들으셨기 때문에, 기억하실 수 있을만한 부분만 간단히 소개하고, 프로젝트 소개에 더 시간을 할애하여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라는 인사말로 시작할 수 여유는 대본을 완벽하게 암기한 사람에게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비기닝 멘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