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의 대답은?
1.
제이는 서둘러 수업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아무도 없는 자신의 차 안에서 숨 호흡을 크게 했다. 그리고, 와이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통화대기 음이 두어 번 울리자 와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응. 오빠, 나야. 나 정확하지?”
“어, 그래! 완전 정확한데? 딱 10시네.”
“응. 난 지금 막 수업이 끝났거든.”
“그랬구나, 고생했다. 오늘도”
제이는 와이와 오늘 하루 소소한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와이도 바쁘게 하루를 보내고 퇴근해서 지금은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라고 했다. 한 십 분쯤 이야기를 나누다가 제이는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응? 뭔 소리야? 갑자기, 뭐가 그래서야?”
“음, 시치미 뚝 떼고?”
“아니, 다짜고짜 뭔 소리를······. 아! 사귀자는 말?”
“그래! 그거 진심이야? 술 취해서 한 소리야?”
“······”
와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제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럼 그렇지! 진심이 아니었구나! 이제 뭐라고 핑계를 대고, 이 상황을 빠져나가려 할까?’
와이는 한숨을 길게 내 쉬더니 말했다.
“그 말은 진심이었어! 사실 나는 너를 좋게 생각은 하고 있었어. 나도 내가 갑작스럽게 그럴 줄 몰랐는데, 그땐 그 말이 진심이었어!”
“그럼, 지금은 아니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근데, 내가 먼저 물어본 거 아니냐? 대답은 네가 먼저 해야지!”
제이는 ‘아! 그런가?’ 싶은 생각에 자기의 심정을 먼저 말했다.
“난, 사실 어제, 오늘 생각이 참 많았어. 오빠한테 사귀자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어찌나 심장이 뛰어대는지, 나 심장병 걸린 줄 알았다니까? 나이 오십 먹고 이럴 일이야?”
와이는 제이의 말에 호탕하게 웃었다.
“그냥, 술 마시다 일어난 해프닝이라고 생각하고 지나가려고도 했었어!”
“아······.”
와이는 가슴이 덜컥한 듯 짧게 움찔했지만, 제이의 목소리에 더 집중하려 애쓰는 듯했다.
“근데, 오빠가 너무 궁금한 거야! 더 알고 싶은 거야! 그리고 계속 생각나는 거야!”
“아, 하하······”
와이는 제이의 말에 수줍은 듯 낮게 웃었다. 제이는 화끈거림은 참아가며 계속 이야기를 이어갔다.
“오빠가 그 몽글몽글한 눈으로 날 쳐다보던 눈빛도 그렇고, 기습적으로 했던 뽀뽀도 그렇고 나, 주말 내내, 그리고 오늘 하루 종일 일에도 집중이 안 되고 오빠 생각만 했어!”
“그랬어?”
와이의 목소리는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전화기 넘어 가득 와이의 그 몽글몽글한 눈빛이 설렘과 벅참으로 가득 넘쳐오는 게 느껴졌다. 제이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했다.
“그래서 생각했지! 오빠 마음만 진심이라면 한 번 가 보기로 말이야!”
제이는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말하고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상기되는 것을 느꼈다. 와이는 긴장했던 모습에서 조금 안도한 목소리로 제이의 말을 이어받았다.
“그래, 나도 좀 그랬어! 나도 내가 술기운에 너무 갔나? 생각하고 잠깐 후회도 했어. 내가 원래 뭘 그렇게 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하는 성격이 아니거든! 근데, 나도 너랑 더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 그건 진심이었으니까”
제이는 와이의 말에 가슴이 더 요동치며 울리기 시작했다. 이 순간이 너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와이가 진지하게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내가 네게 꼭 해야 할 말이 있어.”
와이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잠시 주저하며 한숨을 길게 쉬었다.
“사실은······.”
제이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궁금하면서도 살짝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와이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나 이혼은 했지만, 애 엄마랑 아직 한집에 살고 있어. 앞으로도 우리 영빈이가 성인이 될 때까진 같이 지내야 해!”
제이는 가만히 생각했다. 이혼하고 친구처럼 지내는 사람들은 많이 봤지만, 한집에서 생활하는 게 가능한가?
사실 제이도 이혼한 남편과 원수처럼 척을 지고 지내고 있지는 않았다. 전 남편과 이혼을 해주는 조건은 아들 가람이가 아빠의 부제를 느끼지 않도록 이혼 가정에서 자라는 결핍을 느끼지 못하도록 아이 생일, 명절, 연휴, 방학 때는 꼭 함께 보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었다.
그리고, 그 약속은 가람이가 고등학교 2학년까지 한 번도 어김없이 지켜졌었다. 제이의 주변에서는 그런 제이를 보며 그럴 거면 다시 합치지 뭐 하러 그러고 사냐고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이를 위한 만남이었지 두 사람의 감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엄마로 아빠로 함께한 자리일 뿐 두 사람은 과거의 원망도, 현재의 상황도, 미래에 관한 어떤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고 나눌 필요도 없었다. 오직 아이가 웃고 즐거운 그 순간에만 충실했다.
이런 상황은 제이가 누군가를 만날 때 항상 걸림돌이 됐었다. 늦은 시간까지 학원에서 일하는 제이가 아이를 맡길 곳이 마땅하지 않아서 평일에 시댁에 아이를 맡기고 주말이면 아이를 데리고 와서 시간을 보내는 순간도 제이가 누군가를 만나려 할 때는 상대에게 평범하게 보이지 않았기에 만남은 두세 번을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제이는 전혀 아쉽지 않았다. 자신의 살아갈 이유는 오로지 가람이 하나뿐이었기에 가람이와 자신을 하나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만날 이유가 하등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람이에게 아빠와 만나고 시간을 보내고 부모는 헤어질 수 있어도 아이만은 변함없이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줘야 하는 것에 제이는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다.
친구들도 친구처럼 원망 없이 자연스럽게 전남편과 지내는 제이를 보고 여기가 미국이냐며 답답해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제이는 게이치 않았다. 전남편의 배신으로 일 년을 아파하며 죽다 살아났어도 자신이 어떻게 그를 대하는 것이 아들과 자기가 현명하게 살 수 있는 길인지를 잊지 않고 자신의 감정은 죽이고 아이만을 생각한 것이었다. 비록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 가정을 버린 남자지만 하나밖에 없는 자기 자식을 아끼는 마음은 끔찍하다는 걸 알기에 그거 하나는 인정해 주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금은 아주 조금은 와이의 입장이 이해가 갔다.
“그럼에도 네가 괜찮다면 서로 좋은 감정으로 알아가 보면······.”
제이는 여러 가지 감정과 생각에 잠시 말을 멈췄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엔 침묵이 흘렀다. 와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좀 복잡하지? 생각이 달라지지? 거절해도 난 할 말이 없어!”
“아니야, 다는 아니지만, 나도 비슷한 상황이었으니 이해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근데, 이런 거 물어봐도 되나?”
“뭐?”
“영빈 엄마랑 이혼은 왜 했어?”
“아, 그게 너랑 같아, 영빈엄마가 바람나서······.”
“에고, 그랬구나! 오빠 힘들었겠네.”
“그렇지 뭐······.”
제이는 살짝 무거워질 것 같은 기분에 가볍게 말을 던졌다.
“우리, 그럼 오늘부터 1일이야?”
“응? 아! 하하 그래.”
“그래, 오빠, 우리 함 가 보자!”
“······고마워.”
“근데, 나 벌써 오빠가 보고 싶은데?”
“응, 조만간 꼭 보자! 내가 너희 동네로 갈게”
제이는 오십이 넘어서 이런 두근거림을 느끼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것도 젊은 시절 동경하던 대학 선배에게 그런 마음을 느끼게 되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꿈만 같았다. 흰머리도 여기저기 아픈 관절도 축축 처진 살들도 다 잊고 이십대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에 그야말로 구름 위를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가슴이 콩닥거렸다.
“우리 참 멀게 돌아왔다.”
“어쩔 수 없었잖아? 내가 널 처음 봤을 때 넌 이미 유부녀였고, 네가 이혼했을 땐 내가 유부남이었고······.”
“그렇네, 근데, 오빠 여자친구 있지 않았어? 꽤 오래 사귀던”
“그랬지!”
“근데, 왜 영빈엄마랑 결혼했어? 그렇게 갑자기?”
“그런 걸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지!”
덤덤한 듯 말했던 와이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전화기 넘어 떨리듯 긴 한숨이 들렸다. 그리고 와이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 사실 그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