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의 와이 이야기
1.
와이는 오래 사귄 여자친구가 있었다. 한 살 연상의 과대표였던 그녀와 와이는 학교에서 꽤 유명한 커플이었다. 학교 축제에서 밴드부 공연 중 과대표가 와이에게 공개 프러포즈를 하고 맺어진 사이라서 학교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두 사람 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결혼하지 않았던 이유는 와이가 비혼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원만한 성격의 두 사람은 사귀는 내내 크게 싸울 일이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이 처음으로 크게 싸웠던 날의 이야기이다.
두 사람은 신입생 환영회 문제로 학과 사무실에 먼저 도착해서 다른 동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와이가 여자친구에게 물었다.
“세 살 애기 들은 뭘 좋아할까?”
“갑자기?”
“너, 조카 있으니까 알겠네? 뭐 좋아해?”
“음······ 뽀로로?”
“아, 그래?”
와이는 과실 컴퓨터로 뭔가를 검색했고, 와이의 여자 친구는 사심 가득한 얼굴로 와이에게 말했다.
“와이야! 우리 주말에 신입생 환영회 장소 사전답사 우리가 다녀온다고 하고 바람 좀 쐬고 올까?”
“······”
“맨날 동네 고깃집에서 술만 먹지 말고 조금 멀리 나가는 거 좋겠지?”
“그냥 학교 앞에서 해!”
“애들이 식상해하잖아!”
“멀리 나가면 못 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잖아! 그냥 하던데서 해”
“애들도 다른데 좀 가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여자친구의 말에도 와이는 컴퓨터로 뭔가를 열심히 볼뿐이었다.
“너 내 얘기 듣고 있어? 뭘 그렇게 보는 거야?”
와이는 ‘뽀로로’ 검색해서 뽀로로의 주제가를 심각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제이가 아이 때문에 환영회에 못 나온다고 하면 아이의 관심을 끌 뭔가를 자기가 알아야만 애를 봐준다고 할 수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여자친구는 애들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와이가 이상해서 한참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와이가 곧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는 환한 얼굴이 되었다.
“어! 제이야! 이번 신입생 환영회 올 수 있어?”
와이의 여자친구는 그런 와이의 행동에 화가 났다. 와이가 전화를 끊고 얼굴에서 미소를 띤 채 뽀로로 화면을 닫았다.
“무슨 통화야?”
“어! 제이가 아들 때문에 못 나올 줄 알았는데, 남편이 애 봐주기로 했다고 나오겠다네? 잘 됐지!”
“그게 뭐가 잘 됐다는 거야! 너는 왜 유독 제이를 그렇게 신경 써? 너 걔 좋아해?”
“무슨 말이야! 후배니까 그냥 챙기는 거지!”
“네가 언제부터 여자 후배들을 그렇게 챙겼어? 너 유독 걔한테만 그래! 너 걔 얘기할 때 눈빛부터가 틀려. 왜, 유부녀라 뭐가 좀 틀려 보여?”
“야! 너 무슨 말이 그래?”
그렇게 와이는 여자친구와 처음으로 심하게 다투게 되었다.
“어머! 내 전화 때문에 둘이 처음으로 그렇게 싸웠다고? 진짜?”
“그땐 여자 친구가 왜 그런지 도저히 이해가 안 갔지! 그땐······.”
그 후로도 제이의 얘기만 나오면 여자친구는 바로 날을 세웠다.
“또 제이야? 너 진짜······.”
“아니, 후배가 그렇게 힘들어하는데, 어떻게······.”
그러면 여자친구는 언제나 똑같이 쏘아붙였다.
“후배 좋아하시네! 네 눈빛이 달라! 그 계집애 말할 때 네 눈빛!”
그 뒤로 제이의 남편이 초창기 바람피우다 들키는 사건이 있었다. 그때, 제이는 동기와 선배들을 만나 세상 끝난 것처럼 매일 울며 술주정을 해 댔다. 그런 제이에게 지쳐 하나둘씩 제이를 피할 때도 와이는 늘 제이 곁에 함께였다.
"제이야! 많이 힘들겠다."
와이는 술에 취해 울먹이며 주정하는 제이의 얘길 들어줄 뿐 아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녀의 마음고생을 안타까워해 주며 토닥여줄 수 있음이 다행이라 여겼다. 제이 앞에서 아무 말 없던 와이가 제이가 없는 곳에선 자기 일처럼 열이 받아 화를 냈다. 그 모습이 와이의 여자친구에겐 당연히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개새끼지 그게······, 제이가 지한테 어떻게 했는데, 나쁜 새끼, 아내랑 자식을 두고······, 아! 진짜 열받아! 내 여동생 같았으면 당장 데리고 가서 이혼시켰어, 내가······."
“또 제이 얘기냐? 니 머릿속엔 온통 제이 밖엔 없어?”
“아니, 그냥 후배가 힘들어하니까······.”
“후배? 쳇! 웃기고 있네!”
“솔직히 그 남편 놈이 잘 못 한 건 맞지 않냐?”
“왜? 그래서 이혼하면 걔랑 당장 사귀기라도 하게?”
“너······, 무슨 말이 그래?”
와이의 여자친구는 제이의 남편을 제이보다 더 속 시원하게 욕하는 와이를 보고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심지어 저 남자가 지난 몇 년간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인가?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와이는 여자친구와의 약속도 잊고 제이의 술주정을 받아주고 있었다. 그날도 제이는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먹고 울고 주정을 부렸고, 동기 녀석은 벌써 이제 그만 좀 하라면서 짜증을 내고 있었지만, 와이는 싫은 내색 없이 그녀를 위로해 주고 토닥여 줬다. 한편 와이의 여자친구는 계속 전화도 받지 않고,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도 않는 와이를 찾아 근처 술집은 다 뒤졌다. 그리고, 결국 그들이 있는 술집을 찾았고, 제이를 토닥이고 있는 와이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와이에게 다가와 엎어져 울고 있는 제이를 한 번 보고 당황한 와이를 쏘아보았다. 와이는 자기도 모르게 어쩔 줄 몰라하며 말을 더듬었다.
“여······긴 어떻게······?”
와이의 여자친구는 눈빛이 흔들리는 와이를 보고 차갑게 쏘아붙였다.
"너랑 쟤 남편이랑 뭐가 틀려? 미친······. 얘 남편 바람피워서 힘들어하는데, 왜 네가 이 술주정을 다 받아주고 있어? 왜 네가 그걸 하냐고?”
“그게······혼자서 힘들어하는데······.”
와이는 자신도 모르게 변명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네가 왜?”
“후밴데, 힘들어하는데, 얘기 들어줄 수 있지! 그게 뭐가 문젠데?”
“후배? 넌 맨날 그 후배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뭘 어쩌자는 거야? 너 이 얘 좋아하지?”
와이는 엎어져있는 제이 눈치를 보고 여자친구를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제이는 유부녀에 애 엄만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러니까 그게 내 말이야! 근데, 왜 네가 쟤랑 술 마시면서 그 주정을 받아주고 있냐고······.”
“······”
“좀 솔직해져라! 비겁한 새끼!”
“······”
“그리고, 나 선 볼 거야! 넌 결혼 생각 없지만, 난 아니야! 이참에 우리 그만하자!”
“······”
“꼭 내가 먼저 그만하자고 하길 기다렸던 거 같다, 너?”
“······”
와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한숨만 푹푹 쉴 뿐이었다. 여기까지 듣던 제이는 가슴이 철렁했다. 수화기를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정말 그래서 헤어졌어? 진짜?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아니야! 꼭 너 때문이 아니지 뭐, 여자친구는 결혼하길 원했었고, 난, 내 맘을 알 수 없어서 힘든 시기였거든! 내가 놓친 거야! 확실히 잡아주지 못해서······. 정확히는 그때 그 인연은 거기 까지였던 거지 뭐.”
와이는 잠시 말이 없었고, 제이 역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와이가 긴 한숨을 뱉으며 말했다.
“내가 비겁했지 뭐, 그때”
제이는 오래전 일이지만 와이의 여자친구 심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었고,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와이는 자기 맘을 알 수 없어서 괴로웠다고 하지만 당시 제이도 자기의 마음을 알 길이 없고, 가정을 지키지 못할 것 같은 슬픔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상황이었던 때라 자기도 모르게 와이에게 많이 의지했었다. 당시엔 자신의 아픔만 보느라 와이가 그렇게 힘든 일이 있었는지 살필 겨를도 없었다는 사실에 제이는 마음이 아팠고, 자신의 이기적인 행동이 부끄럽고 후회됐다. 자신만 안쓰러워서 와이가 외롭게 무너져 가게 둔 스스로가 너무 미웠다. 제이는 미안하다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마음에 목이 메어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내가 오빠를 넘어뜨린 것 같은 마음이 들어 너무 속상하다. 정말······.”
제이는 두 사람의 이별이야기에 미안한 마음을 지울 길이 없었다. 와이는 어느 순간 이혼하고 연락이 끊긴 제이를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오랜 연인과의 이별에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리고, 와이는 여자 친구의 결혼 소식을 듣던 날 술에 취해하지 말아야 할 실수를 하게 되었다.
당시 와이가 다니던 회사에는 와이를 짝사랑하는 은주라고 하는 어린 후배가 있었다. 그리고, 와이의 여자친구가 결혼한 그날 와이는 은주와 술을 한잔했고, 몸을 못 가눌 정도로 취했다. 그리고, 그날 두 사람은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저 하룻밤의 실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두세 달쯤 뒤 은주가 회사에 사직서를 냈다. 그리고, 와이를 불러냈다. 커피숍에 앉은 은주의 얼굴은 창백하고 힘들어 보였다. 그녀는 테이블만 내려다보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백지장처럼 하얗고 가녀린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와이는 그런 그녀가 위태로워 보이면서도 뭔지 모를 불안을 느꼈다.
“어디 아파?”
“아니요. 그냥 요즘 속이 좀 안 좋아서요.”
“속이 왜?”
“입덧이 심해서요.”
“??······!!!!!”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리고 와이는 당황했다. 머릿속이 하얘져서 아무런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와이는 오만가지 생각이 났다. 그때 은주가 말을 이었다.
“지울 거예요. 걱정 말아요. 책임지라고 안 할게요.”
순간 와이는 머릿속이 복잡 가운데도 은주가 덤덤하게 애를 지울 거라는 그 말이 가슴에 맺혔다. 와이는 은주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슬프지만 강한 눈빛으로 말했다.
“내가 책임져! 내 아이, 그런 짓은 하지 마!”
와이의 목소리는 갈라졌다. 그리고 눈빛은 슬펐다. 은주는 그런 와이의 표정에 더 마음이 아팠다.
“오빠 저 사랑하지 않잖아요.”
와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하지만 곧 슬픈 미소를 지으며 은주에게 말했다.
“사랑? 해 볼게. 그러니까 엉뚱한 생각하지 마!”
와이는 그게 책임이고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제이는 와이의 동기 경민과 사귄다는 소문이 있었다. 왠지 그 소문이 와이가 은주와 동거를 시작하는데 더 도화선이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때, 와이의 나이는 서른일곱이었다.
2.
“그랬구나! 그럼 애 낳고 결혼한 거였구나?”
“그랬지! 결혼식은 우리 영빈이 세 살 때 했어! 사실 그때 너 이혼하고 힘들게 살려고 애쓰고 있는데, 결혼식 오라고 초대하기 좀 그렇더라.”
“나 동기한테 연락받았었어.”
“아! 그 녀석이 알려줬었구나!”
와이는 제이에게 근데 왜 안 왔냐고 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제이는 이유를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안 갔어, 이혼한 사람이 새 출발 하는데 가서 뭐 좋아?”
“그런 말이 어딨어? 네 잘못으로 한 이혼도 아니었는데······.”
“그래도 그땐 그런 마음이었어. 오빠가 행복하게 잘 살길 바랬고······.”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착잡한 마음으로 지난 시간을 생각하던 두 사람의 침묵을 제이가 깼다.
“나 이제 생각난 게 하나 있다.”
“뭔데?”
“내가 오빠한테 한참 남편 문제로 힘들어하면서 술 먹고 주접떨던 때 말이야!”
“하하, 주접까진 아닌데, 근데?”
제이는 갑자기 그 옛날 일이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화가 살짝 났다.
“나, 경민선배랑 사귀었다는 얘기 들었지?”
“아! 그 얘기······. 알고는 있었는데, 네가 얘기 안 하면 모른 척해 주려고 했었는데······.”
“그런데도 나랑 사귀는 거 괜찮겠어?”
“오래전 일이잖아!”
와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게 오빠 때문이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그 선배 친하지도 않았고, 잘 알지도 못했는데······.”
“근데, 사귀었잖아!”
“그게 다 오빠 때문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