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데이트

순수한 오십

by 인지니

1.


제이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주말 늦은 4시 약속임에도 새벽부터 눈이 떠졌다. 밤새 눈만 감고 어린 시절 만났던 와이를 생각하며 진짜 와이를 만나기로 한 게 사실인지 의심까지 들었다. 설렘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집 안을 청소하고 아들이 챙겨 먹을 음식을 만들었다.


화장을 정성스럽게 하면서 혹시나 자신이 너무 늙어서 와이가 실망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말 모임에서는 저녁 시간이었고, 조명도 어두웠으며 술도 살짝 취해있던 터라 제이도 그저 어린 시절 와이의 모습만 어른거릴 뿐, 정작 지금의 와이 얼굴이 정확히 생각나지 않았다. 맨 정신에 둘만 만나는 건 처음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자 은근 걱정이 됐다. 오늘의 만남을 위해서 급하게 미용실에서 긴 머리에 웨이브를 좀 넣었더니 잘 안 어울리는 것 같고······. 코트를 걸쳤다가 점퍼를 걸쳤다가 고민하는데, 와이의 카톡 메시지가 울렸다.


-사랑해


제이는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결정의 순간이 다가온 느낌이 들었다. 와이의 알람 음을 ‘사랑해’로 바꿔둔 뒤에 혼자서 와이의 고백을 듣는 듯한 기분이 좋아서 행복했는데, 막상 첫 만남을 앞두고는 보고 싶은 마음과 함께 실망에 대한 두려움도 커졌다.


-이제 한 다섯 정거장 남은 것 같아! 추우니까 따뜻하게 입고 나오세요.

-응. 지하철 2번 출구 안에 앉아 있을게요.


제이는 서둘러 나섰다. 그렇게 고민하던 외투들은 다 침대 위에 던져두고 늘 입던 패딩을 걸치고 나섰다.


2.


지하철 2번 출구 안에 만남의 장소 벤치에서 어떤 자세로 앉아 있을까? 책을 보고 있을까? 핸드폰 음악을 듣고 있어야 할까? 제이는 이렇게 저렇게 자세를 바꿔가며 어떤 모습이 가장 자연스러울까? 고민하며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짬을 내서 읽으려 가져온 책의 글씨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빠가 오면 달려가서 안아줄까? 아님, 두 손을 번쩍 들어 흔들어 줄까?’


제이는 와이를 발견하면 어떻게 긴장된 마음을 숨기고 자연스럽게 반길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에 더 긴장돼서 누군가 제이의 앞으로 다가올 때마다 움찔움찔 놀라 일어났다. 제이는 조바심에 결국 벌떡 일어나 지하철 내 광고판 사진 앞에 가서 섰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고 돌아서는데,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두리번거리며 나오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데, 누군가 제이를 보고 활짝 웃었다. 제이는 잠시 눈을 끔뻑이며 웃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어? 와이 오빠가 맞나?’


제이는 평소 안경을 쓰지 않는 오빠와 달리 뿔테 안경을 쓴 남자의 모습에 잠시 움찔했지만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에서 와이가 맞음을 확인하고는 금세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다가가 너무도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아주 오랜 시간 헤어졌다 만나는 연인을 대하듯 사랑스러운 눈빛과 환한 미소로 와이를 바라보았다. 제이는 걱정과는 다른 너무도 자연스러운 행동에 스스로도 놀랐다. 두 사람은 잠시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고 환하게 웃었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둘은 행복하고 벅찬 마음으로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곧 와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제이, 뭐 먹고 싶은지 생각했어?”

“응, 두 군데 정도 생각해 뒀는데, 오빠가 골라봐!”


두 사람은 아주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고 거리로 나섰다.


3.


동네 유명 소문난 고깃집으로 간 두 사람은 숯불을 마주하고 앉았다. 와이가 익은 고기를 제이의 앞접시에 놓으며 말했다.


“제이야! 많이 먹어”


제이는 웃으면서 말했다.


“난 괜찮아! 오빠 많이 먹어!”


두 사람은 술잔을 채우고, 부딪쳤다.


“반갑다. 제이야!”

“근데, 생각해 보니까 오빠랑 나랑 그렇게 술을 마셨어도 이렇게 단둘이 만난 게 처음인 거 알아?”


와이는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와이는 미소 띤 얼굴로 제이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꿈을 꾸는 듯한 모습으로 말했다.


“둘이 이렇게 마주 앉아 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나네.”

“나도 그래, 계속 꿈을 꾸는 것 같아!”

“우리 오늘 알차고 즐겁게 보내자!”

“응, 짠!”


제이와 와이는 술잔을 기울이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제이는 이야기를 나누며 그간 자기 얘기만 했지 정작 와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았는지 들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냥 동기에게 전해 듣기로 와이는 홀어머니와 살다가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혼자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와이는 재혼 가정에서 태어난 늦둥이였다. 양쪽 부모님께서 모두 장성한 아들딸이 네 명씩인 이혼 가정에서 재결합하셨고, 와이를 낳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형제들과는 연이 끊겼고, 홀어머니와 살다가 20대 초반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면서 모두와 인연이 끊어진 채 세상에 홀로 남아 살아왔다고 했다. 와이의 가정사를 들으며 제이는 이 남자 너무 안쓰럽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그래서, 연애가 빨랐던 것 같아! 그 연애에 집착했고, 그게 깨지니까 마음을 잡지 못했고, 핑계 같지만, 실수로 결혼까지 하게 됐고, 사실 애들 엄마하고 잘해 보려고 많이 노력했는데 잘 안 된 거지, 결국 마음이 밖으로 돌게 만들었으니까.”


제이는 잠시 말이 없었다. 지난 시간을 이야기하는 와이의 눈에서 삶의 버거움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늘 씩씩하고 후배들을 챙기던 그에게 이런 아픈 사연이 있었다니······. 결혼해서라도 행복하게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다. 제이는 예전 와이의 블로그에서 보았던 와이가 딸이라고 말하던 아이가 떠올라 물었다.

“근데, 오빠! 오빠 꽤 큰 딸이 있었데? 누구야? 오빠 결혼하고 난 건 아들 아니야?”

“아! 우리 소원이? 그게 사연이 좀 있어!”


4.


와이의 전 부인에게는 어려서부터 챙기던 사촌 조카가 있었다. 전 부인도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할머니 밑에서 컸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사촌 조카가 혼자 이 집 저 집을 전전하고 있다는 소식에 그 애를 보러 갔다. 한겨울에 마당에서 찬물로 씻고 있는 9살 소원이의 모습을 보았다. 와이는 그 애가 눈에 밟혀서 결국 한 달 만에 그 아이를 데리고 왔다. 소원이는 늘 어른들 눈치를 보며 안쓰럽게 굴어서 와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와이는 그 아이를 입양해서 당당하게 키우고 싶었다. 와이는 자기 아들만큼 소원이에게 정성을 들이고 챙겼고, 13살 생일날 소원이가 와이에게 생일축하를 받으며 말했다.


“아빠! 감사합니다.”


와이는 늘 쭈뼛거리던 아이가 자신을 아빠라고 불렀을 때, 아들이 태어났던 순간만큼 기뻤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느라 고기가 다 타고 있었다. 제이는 탄 고기를 한쪽으로 치우며 말했다.


“오빠, 정말 대단하다. 그거 쉽지 않은 일 일 텐데······. 정말 오빠답다. 멋지네!”

“소원이는 그냥 내 딸인데, 뭐······.”


제이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이 남자 진짜 어디까지 멋있는 건가? 하고······.


5.


고깃집을 나와 2차로 가볍게 맥주를 마시러 갔다. 바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손을 꼭 잡고 서로를 바라보며 얘기를 나눴다.


“난, 오빠가 우리 한 번 사귀어 볼래? 하는 그 순간부터 심장 뛰는 속도가 세배는 빨라진 것 같아! 진정이 안 되는 거 있지?”

“아이코, 이걸 어쩌냐? 심장에 너무 무리가 가면 안 좋은데? 우리 제이에게 사랑은 건강에 안 좋은가? 안 할 수도 없고 어쩌지?”

“하하, 그래서 내가 너무 힘들어서 ai한테 물어보니까 도파민이 최소 3개월에서 길겐 2년까지도 가는 사람들도 있데. 사랑하는 걸 어쩌겠어. 감당해 봐야지!”


와이는 하하 웃더니, 술을 한 모금 먹고는 두 손으로 제이의 손을 다시 꼭 잡으며 말했다.


“진짜 고맙다. 제이야! 우리 그 도파민 2년 길게 가 보자! 이렇게 쉼처럼 한 번씩 만나면서 서로 알아가자!”

제이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아흑! 진짜······. 내 심장!”

“앗! 어떡해?”


두 사람은 하하 호호 나이와 삶의 고단함을 모두 잊고 두 사람만의 시간에서 행복하게 웃었다.


“오빠! 나 오랜만에 오빠 노래 듣고 싶다. 우리 노래방 가자!”

“노래? 나 노래 안 한지 백 만년도 넘었는데?”

“괜찮아! 실력이 어디 가겠어?”


와이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음, 음. 아, 아. 아! 될까 모르겠네?”


6.


은근하게 취한 두 사람은 젊은 시절 즐겨 듣던 노래들을 선곡했다. 제이가 먼저 선곡해 부르고 분위기를 띄웠고 곧 와이가 선곡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잘 있었냔 인사가 무색할 만큼
괜한 우려였는지
서먹한 내가 되려 어색했을까
어제 나의 전활 받고서
밤새 한숨도 못 자 엉망이라며
수줍게 웃는 얼굴
어쩌면 이렇게도 그대로일까
그땐 우리 너무 어렸었다며
지난 얘기들로 웃음 짓다가
아직 혼자라는 너의 그 말에
불쑥 나도 몰래 가슴이 시려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조금 멀리 돌아왔지만 기다려왔다고
널 기다리는 게 나에게 제일 쉬운 일이라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고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여전히 난 부족하지만 받아주겠냐고
널 사랑하는 게 내 삶에 전부라
어쩔 수 없다고 말이야


와이는 전람회의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를 정말 가사 하나하나를 꾹꾹 눌러서 불렀다. 제이도 그 노래를 들으며 울컥 눈물이 났다. 간주가 나오자 와이가 제이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제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이야! 고마워!”


제이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와이의 품에 꼭 안겼다. 와이는 제이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자신을 쳐다보는 제이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 살며시 자신의 입술을 맞대었다. 제이는 두 눈을 꼭 감고, 두 손으로 와이의 옷자락을 꼭 잡았다. 두 사람은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의 반주가 흐르는 동안 그렇게 한참을 깊고 진하게 오랜 시간 기다렸던 마음을 키스로 나누며 서로의 마음과 사랑을 확인했다.


7.


제이는 굳이 표를 끊어 전철역 플랫폼 안까지 들어와 와이를 배웅했다. 누가 보든 말든 두 사람은 나이와 체면도 잠시 잊고, 20대의 연인들처럼 꼭 부둥켜안고 전철을 기다렸다. 조금 취한 제이가 말했다.


“오빠! 진짜 그냥 갈 거야?”

“곧 또 만나면 되지!”

“안 되겠다! 다음엔 내가 오빠 사는 쪽으로 갈게. 못 보내겠어! 내가 오는 게 낫지.”

“아니야! 괜히 좁은 동네서 만나다가 애들 엄마 귀에 들어가니까 내가 올게.”


제이의 웃는 표정이 금세 어색하게 굳었고, 그녀는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애들 엄마 귀에 들어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제이는 와이를 떼어놓으며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입을 달싹거리며 그 말의 뜻을 물어보려는데, 전철이 도착했고 문이 열렸다. 와이는 전철에 올라탔다. 그리고 제이의 이상한 표정을 보았다. 와이는 제이에게 뭔가 말하려 했지만 전철문이 닫혔다. 전철 창으로 제이를 바라보는 와이의 모습에서 아쉬움보다는 속상함이 비쳤다. 전철이 떠나고도 제이는 한동안 그 자리에서 어이없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취해서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종일 행복했던 기억보다 와이의 마지막 말이 더 오래 남아 의문만 가득해졌다. 그렇게 두 사람의 첫 데이트는 끝났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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