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택시에 탔던 그 남자

엇갈림의 시작

by 인지니

1.


“그게 무슨 말이야? 나 때문이라니?”

“오빠! 지금 어디서 통화하는 거야?”

“나? 밖이지!”

“안 추워?”

“하나도 안처어여.”

“하하하·····. 입이 다 얼었네! 오늘은 그만 들어가자! 나도 아직 차 안이라서·····.”

“아이코, 아직 차 안이었어? 얼른 퇴근해야겠구나! 그래 우리 내일 또 통화하자!”

“응, 그래 오빠! 조심히 들어가요.”

“그래, 집에 가서 푹 쉬고 잠이 오지 않는다거나 그러면 카톡 해도 좋고.”

“응, 알겠어. 오빠!”


수화기 너머에서 와이의 숨소리는 제이만큼이나 통화의 끝이 아쉬움으로 가득한 게 느껴졌다. 하지만, 시간이 벌써 한시가 넘어가 있었기에 제이도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제이가 집에 들어오자 가람이가 안 자고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 왜 이렇게 늦었어?”

“아······, 뭐, 그, 채점할 게 좀 많았어!”

“응, 그랬구나! 얼른 씻고 주무세요. 나도 이제 잘 게.”

“그래.”


자기 방으로 들어간 가람이를 보면서 제이는 생각했다.

‘저 녀석 때문에 그렇게도 치열하고 힘겹게 살아왔는데, 이제 어느새 엄마 걱정을 하는 듬직한 녀석이 되었네.’


제이는 욕조에 물은 받았다. 따끈한 물에 잠시 몸을 담그고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연말 모임이 있던 그날, 택시를 기다리며 자신에게 키스하고는 수줍게 웃던 와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온몸을 비비 꼬며 물속으로 머리까지 쏙 집어넣었다. 이때, 문뜩 낯선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 제이의 입술 덮쳤다. 놀란 제이는 물 밖으로 ‘푸아’ 숨을 내쉬며 미간을 찌푸렸다. 결국,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그날이 떠올랐다.


처음 남편의 바람을 알고는 제이는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무작정 나와선 매일 선 후배 닥치는 대로 불러서 술을 먹었다. 제이 나름의 복수였고, 그렇게 자신의 슬픔을 표출할 수밖에 없었다. 매일 반복되는 날들에 염증을 느낀 친구들은 하나둘씩 핑계를 대며 제이를 피했지만, 와이만은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제이와 술잔을 기울여주고 제이의 푸념을 들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학부 시절 복학생으로 유명했지만, 제이와는 따로 일면식이 없던 와이의 동기 경민이 술자리에 합석했다.


“선배! 이게 말이 돼? 애가 이제 겨우 다섯 살이야! 근데, 더 웃긴 게 뭔 줄 알아? 그 여자가 울 애 백일 때 애 내복을 사 들고 왔었다고, 우리 집에······.”

“아는 여자야?”

“알고 말고, 아주, 가람 아빠가 나 선배들 남자 동기들이랑 친한 거 보고,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냐고, 맨날 나더러 연애하러 학교 다니냐고 난리였잖아?”

“그랬어?”

“그러더니 자기 현장에 친구 생겼다고 좋아하더라? 그래서 나도 좋아했어! 이제 날 좀 이해하겠다 싶어서”

제이의 얘기를 정성껏 들어주며 눈물 흘리는 제이에게 휴지도 건네고, 잔이 비면 술도 따라주는 와이와는 달리 경민은 홀짝홀짝 술을 마시면서 제이를 훑었다. 그리고, 와이와 제이를 번갈아 보면서 묘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훅 제이의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아직도 남녀 사이에 친구가 된다고 생각해?”


제이는 이건 뭐야? 하는 표정으로 경민을 쳐다보았다. 와이도 경민을 바라보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안 돼? 우리 선 후배 동기들 다 친구 사이로 잘 지내는데······.”


경민은 묘한 표정으로 와이를 보며 말했다.


“제이가 너한테 그냥 후배란 거지?”


와이는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굴렸다. 그리고 곧 평정심을 찾은 듯 말했다.


“그럼! 내가 아끼는 후배지!”

“뭐, 그럼 됐고, 제이는 어때? 아직도 그렇게 생각해?”


제이는 이미 술에 취해 눈이 풀려 있었다. 그러니, 경민의 말에 논리적으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제이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혀가 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적어도 둘이 진짜 친구라고 생각했떠. 진짜”


제이는 그렇게 말하곤 그대로 테이블로 엎어졌다. 와이는 놀라서 제이를 흔들었고, 경민은 제이를 보며 와이에게 말했다.


“야! 얘 은근히 귀엽다.”

“뭐래? 얼른 택시 태워 보내야겠다. 얘가 요즘 계속 술을 먹어서 더 체력이 약해진 것 같아! 속상해하는데, 못 먹게 할 수도 없고, 참······.”


그렇게 제이를 부축하고 택시를 잡은 와이는 제이를 흔들어 깨웠다.


“제이야! 일어나. 집에 가야지! 정신 차려야지?”


제이는 눈을 뜨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나, 하나도 안 취했떠! 덕정하지 말고 가요. 아저씨 우리 디브러 가 두데여. 헤헤”


이때 와이의 전화기가 울렸다. 와이는 전화를 받으며 택시 문을 닫고 기사에게 제이를 부탁했다. 전화기 안에서 와이 여자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야! 너 또 제이랑 술 먹어?”


와이는 인도로 올라서며 택시의 번호를 보았다. 전화기 안에서 언성이 높아졌다. 제이는 슬픈 눈으로 그런 와이를 쳐다보았다.


“야!”


와이는 급히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지금 막 택시 태워서 보냈어!”


그렇게 택시 안에서 떠나는 와이를 보며 풀린 눈을 꿈뻑이던 제이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와이 오빠! 고마워”


그 둘의 뒤를 따르던 그림자가 와이가 여자친구와 통화를 하는 사이, 조금 앞쪽에서 제이가 탄 택시를 세웠다.

“제이야! 이렇게 취해서 집에 갈 수 있겠어?”


그는 제이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아저씨 상동 쪽으로 가 주세요.”


제이는 풀린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어! 와이 선배?”


그렇게 말하곤 제이는 그의 어깨로 푹 쓰러졌다.


2.


제이가 정신이 좀 들어 눈을 떴을 때 제이는 낯선 침대에 누워있었다. 놀란 제이의 몸 위로 쓱 올라오는 남자. 제이는 잠깐 그가 와이인 줄 알았다. 하지만, 곧 제이는 고개를 흔들고 다시 남자를 보았다. 그는 경민 선배였다. 제이는 움찔 놀라 잠시 몸을 움츠렸다.


“왜? 싫어?”


제이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이건 현실이 아닐 거야! 생각했다. 그 잠깐 사이 별별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경민의 뜨거운 숨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내게 희망이란 게 있겠어? 까짓 거 어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이 자신을 배신한 남편과 세상에 복수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제이는 각오한 듯 눈을 꼭 감았다. 그러자 경민의 입술이 제이의 입술을 거칠게 더듬었다. 제이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렀다. 남편도 와이도 아닌 모르는 남자에게 자신을 내어 맡긴 자신의 선택이 슬퍼서라기보다 그 순간 와이의 얼굴이 떠올라 더 슬퍼졌다.

다음날 제이는 쓰린 속을 부여잡고 어제의 일을 생각했다.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왜 나는 안 되는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제이는 꼬박 이틀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경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 우리 좀 만나요.”

경민은 약속 시각이 30분이나 지나서 카페에 나타났다. 제이는 그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겉은 아주 멀쩡해 보였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자리에 앉은 경민은 제이를 보며 말했다.


“난 라떼!”


제이는 어이없게도 아무 말 없이 라떼를 사다가 경민 앞에 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어제 일은 없었던 일로 해요.”

“그래? 뭐 나도 원하는 바야! 근데, 우리 어디 가서 한잔할까?”


제이는 그렇게 경민에게 끌려다녔다. 경민은 선을 긋고 자신을 이용하는 줄 알면서도 제이는 매달렸다. 자신을 포기하고 놓아버릴수록 경민에게 더 매달렸다. 그리고 그럴수록 제이는 더욱더 망가져 갔다.


3.


샤워를 마치고 나온 제이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마음이 계속 불편했다. 때마침 와이에게서 카톡이 왔다.


-잠자리엔 들었어? 오늘 정말 꿈만 같다.


제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답장을 썼다.


-오빠, 나 아무래도 심장병이 생겼나 봐!

-왜? 심장이 안 좋아?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쿵쾅거려서 미칠 것 같아! 오빠 때문인 것 같은데?

-하하······. 큰일이네? 사랑이 제이 건강에 해로운 거라면 하지 말아야 하는데, 안 할 수도 없고······. 어쩌지?


제이는 침대에서 혼자 몸을 비틀며 부끄러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오빠, 내가 잘 감당해 볼게.

-그래! 아무튼, 정말 고맙다. 제이야!

-아냐, 나도 고마워!

-잘 자~

-응, 오빠도 잘 자고 내 꿈에서 만나

-하하하······. 최선을 다 해 볼게.


제이는 이 몽글몽글한 마음을 어찌해야 하는지 처음 느끼는 기분에 잠은 이미 다 달아나 버린 듯했다. 그리고, 제이는 AI 앱을 열었다. 그리고 글을 입력했다.

‘새 연인에게 과거의 일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중요한 건 그들 둘이 친구야! 한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내가 증오하는 사람인데, 아직도 그들은 친구야! 어찌해야 할까?’

AI가 대답을 정리하려고 커서를 깜빡이고 있는 동안 제이는 무거운 마음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


4.


다음 날 저녁 학원을 마치고 집에 가면서 제이가 와이에 톡을 보냈다.


-오빠, 나 이제 끝났어. 오빠는?


답은 없고, 점들만 열심히 춤을 춰댔다. 제이는 경민의 이야기를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그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오늘 하루 잘 보냈어요? 제이씨?”

“아! 뭐야! 제이씨가~하하”

“이젠 예우를 갖춰야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인데······.”


제이는 이젠 꼼짝없이 묻겠지? 하는 마음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리고, 먼저 말을 꺼냈다.


“경민 선배 말이야!”

“제이야! 말하기 싫으면 굳이 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니, 알아야 할 게 있어! 난 처음 경민 선배가 오빠인 줄 알고 만나게 된 거야! 그날 취해서 난 오빠가 날 데려다주는 줄 알았거든!”

“뭐라고? 경민이가 아니고 나인 줄 알고 그렇게 된 거였다고? 정말?”

“응.”

“아·······.”


와이는 그 오랜 시간을 거슬러 그날로 가서 그 택시를 탈걸 하는 생각을 하는 듯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런데, 오빤 내가 경민 선배랑 사귄다는 소문을 어디서 듣게 된 거야?”

“동기가 얘기하더라 너 동문 임원 활동할 때 경민이랑 따로 만나는 거 여러 번 봤다고, 그래서 난 둘이 좋은 마음으로 만나나 보다 생각했었지!”

“아니, 나도 그 선배도 우리 서로 좋은 마음으로 만났던 날이 하루도 없었어. 우린 그런 만남이 아니었어! 그 사람은 그냥 이용하기 좋은 쉬운 여자 하나 건진 거였지! 심지어 자기 여자친구까지 내게 소개했어! 결혼할 사이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 앞에 여자친구를 데리고 나타나 소개하는데, 어이가 없더라 진짜······.”


전화기 너머에서 뭔가 '쾅' 하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란 제이는 물었다.


“무슨 일이야 오빠?”

“······.”


아무 말이 없는 와이의 숨소리가 거칠었다. 한참을 와이는 거친 숨만 몰아쉴 뿐 아무 말이 없었다. 조금 진정이 된 것일까? 뭔가 얘기를 하려다 멈칫하더니 약간 화가 난 목소리로 와이가 말했다.


“근데, 그런데 걔 왜 만났어. 제이야! 그런······. 새끼를······. 하······, 그날 내가 택시에 탔어야 했는데······.”


제이는 할 말이 없었다. 자기도 그때의 자신에게 묻고 싶은 말이었으니까······. 왜 그런 남자를 만나며 스스로를 깎아 먹으며 힘들어했는지를······.


“······.”

“아니다. 다 내 탓이지! 그때 내 감정을 나도 몰라서 널 혼자 둔 내 탓이다. 제이야!”

와이의 숨소리가 다시 조금 거칠어졌다. 한참을 침묵하는 와이는 콧물을 훌쩍였다.

“오빠, 울어?”

“내가 너무 미안해서······.”

“오빠가 왜 미안해!”

“······.”


두 사람 사이엔 수화기 너머로 서로 눈물을 삼키듯 긴 침묵이 흘렀다. 와이는 곧 억지로 웃으며 조금 진정한 듯 차분하게 말했다.


“잊자! 제이야! 우리 다신 그 자식 생각도 하지 말자! 그냥 없었던 사람처럼 잊어버리자!”

“······응, 그럴게”


그렇게 말하는 와이의 한숨은 제이보다 더 길고 깊었다. 그러나 와이는 곧 환기하고 제이에게 다정히 말했다.

“우리, 이번주말에 볼까?”

“정말?”


제이는 설레면서도 살짝 긴장이 되는 마음에 입술을 앙 다물었다.

일요일 연재
이전 04화비혼주의자가 결혼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