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우리

설렘

by 인지니

1.

제이가 탄 택시는 새벽, 차 한 대 없는 길을 한 시간 반 정도를 달려 제이의 집 앞에 도착했다. 와이가 결재해 준 덕에 편하게 집에 왔다는 생각에 도착하자마자 와이에게 톡을 보냈다.


-오빠, 저 집에 잘 도착했어요.

-그래! 푹 잘 자.

-응, 오빠도요.


제이는 멈춰진 카톡 창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자기 얼굴을 ‘톡’ 때려보았다. 볼이 아픈 걸 보니까 꿈은 아닌 듯싶었다. 제이는 계속 꿈을 꾼 듯 멍한 기분이 들었다. 괜한 생각 그만하고 자야겠다는 생각에 화장대 앞에 앉았다. 클렌징크림을 얼굴에 바르고 문지르는 순간 20년 전, 그날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그날은 신입생 환영회가 있었고, 동기들과 선배들이 모두 모이기로 약속을 한 날이었다. 제이의 남편 성수가 쉬는 날이었기에 아들 가람이를 봐달라 했고, 성수는 그러겠다고 찰떡같이 약속을 했었다. 제이는 아침부터 신이 나서 아들의 간식과 식사를 준비해 놓고 화장을 했다. 그런데, 애를 봐주겠다던 성수가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서는 게 아닌가? 제이는 불길한 마음에 서둘러 남편을 부르며 물었다.


“가람 아빠! 어디가?”

“약속 있어. 갔다 올게.”

“무슨 소리야! 오늘 내가 대학교 모임 있다고 그랬잖아!”

“애 엄마가 그런데, 쫓아다니고 그러는 거 아냐! 집에나 있어!”


성수는 그렇게 집을 나가버렸다. 제이는 거실 가운데서 뽀로로 기차를 밀며 놀고 있는 가람이를 보고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한숨을 깊이 내쉬고는 클렌징크림을 손에 덜었다. 이때,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제이야! 왜 안 와! 다들 기다리는데?”

“아! 선배! 나 오늘 못 갈 것 같은데?”

“무슨 소리야! 오늘은 꼭 온다고 그랬잖아?”

“가람이 봐줄 사람이 없어!”

“가람이 데리고 나오면 되지! 내가 봐줄게. 데리고 와! 나도 가람이 얼마나 컸는지 보고 싶다.”


제이는 아이를 데리고 나가면 민폐라는 걸 알면서도 매일 집에서 애 만 보고 있던 지루함에 미안한 마음은 접고 가람이를 안고 모임 장소로 향했다.

제이가 고깃집에 들어서자 동기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다들 아직 아기가 없어서 가람이는 여자 동기들과 후배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하지만, 선뜻 애를 데리고 가서 봐주는 친구들은 없었다. 제이는 가람이를 무릎에 앉히고는 고기를 잘게 잘라서 가람이 입에 넣어주느라 정작 자기는 먹어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보던 와이가 제이 옆으로 와서 앉더니 가람이를 번쩍 들어 안고는 말했다.


“가람이 삼촌이 밥 먹여줄까?”

“아, 선배 괜찮아! 선배도 먹어야지!”

“난 너 오기 전에 많이 먹었어! 내가 먹여볼 테니까 너 어서 먹어!”


제이는 와이의 자상함에 고맙고 미안한 생각에 서둘러 밥을 먹었다.


“천천히 먹어! 체한다. 가람아! 아 해봐!”


제이는 총각이 어쩜 저렇게 애도 잘 보나 싶은 마음에 미소로 와이를 바라봤다. 식사를 마치고 모두 노래방으로 향했다. 제이도 워낙 노래를 좋아하는데, 남편 성수는 노래방을 싫어해서 가람이 낳고는 한 번도 노래방에 가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신이 나 노래방에 간 제이는 아이를 안고 선배 동기들 노래를 듣고만 있었다. 그때, 와이가 다가와서 또 가람이를 번쩍 안아 데리고 가더니 가람이에게 마이크를 쥐여주고는 노래 시작 버튼을 눌렀다. 뽀로로 반주가 흘렀고, 가람이는 신이 나서 엉덩이를 흔들었다. 그러자 와이는 탬버린을 흔들며 가람이와 같이 ‘노는 게 제일 좋아!’ 하면서 뽀로로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겠는가? 제이는 밴드부 록보컬이 뽀로로를 부르는 그 모습이 너무 웃기서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그런 선배의 모습에 살짝 착잡한 마음도 느껴졌다. 자기가 결혼을 너무 일찍 한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제이는 와이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선배! 총각이 어떻게 애를 이리 잘 봐? 조카 있어요?”

“아니, 여자친구한테 물어봤지! 애들 뭐 좋아하는지······.”


‘아! 여자친구······.’ 제이는 그 말에 묘하게 질투를 느꼈다. 그리고, 자상했던 와이의 모습이 두고두고 남편과 비교되었던 날이었다.




화장을 지우다 떠오른 와이의 다정함이 지금의 제이의 눈도 몽글몽글하게 만들었다. 제이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 피부도 푸석하고 눈도 처진 데다가 듬성듬성 흰머리가 난 오십의 아줌마가 보였다. 제이는 생각했다.


“에라! 술 취해서 그냥 해 본 소리겠지! 다 늙어 무슨 연애야!”


제이는 그날 그렇게 술기운에 잠이 들었다.


2.

몽글몽글······. 와이는 그런 눈빛으로 제이를 바라보며 웃었다. 제이도 그런 마음으로 와이를 올려보며 웃었다. 두 사람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꿈을 꾸는 제이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엄마!”


아들의 목소리에 제이는 눈을 번쩍 떴다.


‘꿈이었구나!’


제이는 아직도 꿈의 여운이 남아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엄마! 재밌는 꿈 꿨어? 뭐 그렇게 자면서 웃어?”

“내가?”

“응, 나 엄마 통화하는 줄? 새벽에 와서 뭔 통화인가 하고 들여다보니 자면서 웃고 있던데?”

“아! 그래? 엄만, 모르지 잠꼬대인걸······.”


제이는 행여나 어제의 일을 아들이 눈치챌까 민망함에 얼버무리며 말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주책맞은 자신이, 이런 기분이 얼마 만인가 신선하단 생각도 들었다.


“어제 재밌었나 봐? 엄마 얼굴이 엄청 환한데?”

“응, 진짜 오랜만에 봤거든! 다들 나이가 오십에 가까운데도 옛날 모습 그대로인 게 너무 신기해!”

“근데, 맨날 그렇게 술을 먹어야 할까요? 아주 요 며칠 엄마가 얼마나 술을 마시고 왔는지 엄마가 만진 문고리에서도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적당히 마셔~ 책 한 권 내고 끝낼 거야?”

“알았어! 적당히 해 볼게.”


제이는 아들의 걱정을 들으며 또 생각했다. 엄마 바짓가랑이 붙들고 엄마랑 같이 살겠다고 울고불고하던 녀석이 어느새 저렇게 커서 엄마 걱정을 하고 있나! 싶은 생각에 뿌듯함이 들었다. 그리고, 드는 생각!


‘나도 정말, 우리 가람이 하나만 보고 이제 것 많은 인연을 지나치며 살았구나!’


제이는 와이의 결혼식에 가지 않았었다. 그저 제이의 블로그에 올려진 와이의 청첩장을 보고 왠지 모를 착잡함을 느꼈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났다. 제이는 그때 와이가 올렸던 청첩장을 보려고 블로그에 접속했다. 오랜만에 자신의 첫 글부터, 당시 중학생이었던 가람이를 키우며 어려웠던 이야기들 사람들과 겪으며 어려운 얘기들 등 지난 십여 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와이의 청첩장은 까맣게 잊고 자신의 삶에 가장 우울하고 힘들던 시절 글 쓰는 일을 놓지 않으려고 썼던 일기 같은 글들을 다시 찬찬히 살펴보았다. 당시의 힘들고 불안했던 마음이 고스란히 소환 돼서 눈물이 맺혔다.


-하루하루 힘들지만 버텨 내시는 작가님의 모습. 늘 응원합니다.

-책을 내시면 제가 첫 독자, 1호 팬이 되겠습니다.

-아드님이 벌써 중학생이군요. 고생하셨습니다.

-우울한 날이지만 글 속에 희망이 보여요. 힘내세요.


‘나의 첫 독자님의 댓글 덕에 참 힘이 났었는데······. 이 분은 요즘 어떻게 지내시려나······.’


제이는 자신의 글에 늘 응원과 격려를 보내던 첫 독자님의 댓글을 보면서 당시 힘들었던 순간에 부족한 자신의 글과 삶에 응원을 주던 댓글들에 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그리고, 방명록에 동기가 올려둔 와이의 청첩장이 보였다. 늘 후드티에 모자를 눌러쓴 와이의 모습과 달리 턱시도 정장을 입은 삼십 대의 와이를 보니 낯선 느낌이 들었다.


‘오빠의 삼십 대는 이런 모습이었구나!’


제이는 삼십 대의 와이를 바라보다가 그의 아내의 자리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새 신부를 보았다. 이렇게 행복하게 웃고 있는 두 사람은 왜 헤어진 걸까? 와이는 또 어떤 상처를 갖고 있는 걸까? 제이는 이제 와이의 모든 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녀를 어떻게 만났고, 왜 헤어졌는지 지금 심정은 어떤 건지······. 그리고, 그 예쁜 시절 왜 자신과 와이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3.

‘혹시 이 남자 술기운에 그냥 한 소린데, 내가 너무 과민반응을 보이는 거라 생각하면 어쩌지? 그냥, 그날의 술주정 정도로 끝내야 하는 걸 내가 너무 설레는 걸까? 내가 아닌 다른 여자 후배가 나왔어도 똑같은 고백을 했을까?’


제이는 와이의 진심이 궁금해졌다. 혹시 실수인데, 제이가 너무 깊게 생각하는 것이라면 자신이 우스워질 것 같아 걱정도 됐다. 진심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지만, 그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기도 어려웠다. 저녁때쯤 술기운이 조금 가라앉았다. 제이가 먼저 와이에게 카톡을 보냈다.


-오빠! 속은 좀 괜찮아?


제이는 1이 지워지지 않는 카톡 창을 보며 괜히 보냈나 몇 번을 후회했다. 이때 와이의 답이 왔다.


-응. 어제 무리하긴 했는데, 지금은 괜찮아!

-다행이다. 난 죽겠는데······.

-뭐라도 좀 먹었어? 해장해야지!

-응. 오빠는 뭐 좀 먹었어?

-나도 이제 좀 먹으려고.

-그래, 속 잘 풀어.


제이는 차마 어제의 일을 물어볼 수도, 어제 와이의 마지막 질문에 대답할 수도 없었다. 당장 탁 터놓고, ‘어젠 무슨 말이냐?’ ‘진심이냐?’ ‘술 취한 거 아니냐!’ 이것저것 묻고 싶었지만, 정말 술에 취해 한 헛소리다고 할까 봐 물어볼 수가 없었다. 제이는 수도 없이 반복되는 ‘사귀어 보고 싶다’는 마음과 그냥 술 취해 그런 거겠지, 관계만 어색해질 수도 있으니까 술 마시고 일어난 해프닝 정도로 넘어가자! 는 두 마음이 자꾸 왔다 갔다 하며 마음을 정하기가 어려웠다.


제이는 하루 종일 와이의 카톡 창을 들여다보며, 오빤 왜 다음 말이 없지? 하는 생각으로 답답했다. 다음날, 학원에서 아이들과 수업을 하던 제이가 칠판에 x축과 y축을 그려놓고는 ‘y’에 계속 분필로 동그라미를 그리는 자신을 보고는 깜짝 놀라다가 결심했다.


-오빠! 우리 저녁에 통화 좀 할까?


카톡의 글 속에서도 당황하는 느낌이 그대로 느껴졌다. 제이도 심장이 콩닥 거렸다.


-어! 그래! 몇 시쯤?

-나 수업이 10시쯤 끝나! 끝나고 내가 전화할게. 괜찮아?

-어! 괜찮아


제이는 그렇게 괜찮다는 와이의 답장에 깊은 숨을 내 쉬고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이제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맞닥뜨려야 할 이야기였다.

제이는 학생들을 다 보내고 서둘러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올랐다. 그리고 숨을 가다듬고는 와이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고 와이가 전화를 받았다. 제이의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오빠! 나 정확하지?”

“하하, 그래 진짜 정확한데?”

“내가 좀 그래~”


제이가 선뜻 다음 말을 잇지 못하자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며 화제를 돌리려는 듯 와이가 말했다.


“매일 이 시간에 끝나는 거야?”

“응! 학원 수업이 다 그렇지 뭐”

“대견하네, 늘 이렇게 늦게 끝나는데, 그 사이 글 쓰는 일도 해내고”

“그 꿈으로 버텼는데, 뭐······.”

“그래, 꿈을 이뤘네. 축하해!”


제이는 계속 자신의 의도를 모르는 척 딴소리만 하는 와이가 답답해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래서?”


와이는 정말 모르겠다는 투로 말했지만 목소리의 떨림은 고스란히 전화기 너머로 느껴졌다. 제이는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까 걱정이 될 정도로 심장이 쿵쾅거렸다.


“다자 고자 뭐가 그래서야?”

“아니, 잔잔한 호수에 바위돌을 투척하고 갔으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와이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떼다가 제이의 다그침에 이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쑥스러워하며 말을 이었다.


“아~ 그거? 하하하, 난 또 무슨 말인가 하고, 야! 근데, 그건 네가 대답을 해야 하는 거 아냐?”

“응?”

“네가 대답할 차례라고, 그래서?”


와이는 도리어 제이에게 '그래서' 라며 제이의 대답을 독촉했다. 전화기에서 마치 제이와 와이의 심장이 살아서 뛰는 듯, 둘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의 차 안이 후끈거렸다. 입이 바짝 마르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때, 와이가 마음먹은 듯 말했다.


“제이야, 나 그 말 술 취해서 그냥 한 말 아니야!”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