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의 여름
사람은 누구나
꿈을 키우던 공간이 있다
미래는 불확실하지만
만들어가는 하루하루가 소중하던 시절
나에겐
모교가 있는 신촌이 그렇다
지금은 많이도 바뀌었다만
군데군데 놀랍게도
20여 년의 세월을 버텨준 공간이 있다
제대할 때쯤 생겼던
당시 힙한 호프집은 이제 노포가 되었다
허름하다 못해 을씨년스러울 정도의 모습이지만
학생 때 봤던 간판이 그대로라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한 걸 겨우 참았다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주인공 토토의 고향에 있던
마을의 한 작은 극장 같은 느낌이랄까
성공한 토토는 세월이 지나고
결국 그 극장이 헐리는 걸 지켜본다
자신의 꿈이 키워지던 공간이
다이너마이트 한방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과연 중년의 토토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지금도 가끔 신촌을 가본다
신촌을 가면 꼭 들르는 닭갈비집이 있다
물론 지금은 주변에
훨씬 맛있고 푸짐한 집이 많지만 꼭 여기를 간다
막연한 꿈을 키우며
머리보다는 가슴이 뜨거웠던
20여 년 전 나를 만나기 위해서다
대학생 때의 나를 만나면
왠지 짠해서 안아주고 싶고
잘하고 있다고 토닥여주고도 싶다
그 당시에는 베이비복스 노래가
지금은 오마이걸 노래가 식당을 가득 채우고 있다
서울에는 점점
내가 나를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줄어간다
깨끗하고 편리하지만
내가 남을 만날 수 있는 공간만 늘고 있다
정말 보존이 최고의 개발일 수 있겠다
특히 요즘만큼 인문학적 따스함이 간절한 때에는
*닭갈비 라면사리 추가하며 떠오른 기억*
책가방에 무거운 원서와
다 찌그러진 플로피디스크
씨네21 스프링노트 등을 한가득 메고
터덜터덜 신촌역 3번 출구를 빠져나온
영문과 학생은
홍익문고에 들러
당대 잘 나가는 책들을 스캔한다
그중 몇 권은 반 의무적으로 구입
읽지도 않을 걸 알면서도
가뜩이나 무거운 책가방을 빵빵하게 만든다
세상을 다 가지라는 통신사 카드가 제휴된
PC방에 들어가 10장의 리포트를 무료 출력하고
정문 앞 대학약국에서 박카스 한 병을 입에 물고는
행여 지각할까 잰걸음으로 교문을 통과한다
20여 년 전 신촌의 여름을 만나게 해 준
약국 서점 다방 닭갈비집 호프집
묵묵히 버텨줘서 고마워요
앞으로도 건승하길 기원할게요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