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그 진부한 낭만에 대하여
그래도 에펠탑은 봐야지.
교과서에서도, 배경화면에서도, 인터넷 페이지 그 어디에서라도 질리게 봐온 그 에펠탑을 파리에 왔다는 이유로 또 볼 필요가 있을까. 이렇게까지 회의적일 필요가 있나 싶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도 에펠탑은 봐야지.
유난떨고 싶지 않다는 오만한 생각으로 지도 사이를 헤맸다. 앨범 속 대부분이 관광객 시선의 사진이었고 이어폰을 귀에서 빼지 않았고 내내 긴장하고 있었다. 인셉션 영화에 나온 그 다리 이름이 뭐였지. 제대로 알아본 것도 없고 알아볼 생각도 없어 잡생각에 거슬려 하고 있었다.
장재인의 '다른 누구도 아닌 너에게'를 듣고 있었다. 역시나 큰 이유는 없었다. 왜 멍청하게 자꾸 거리를 두려고 했던 걸까. 노래의 후렴구가 나올 때 비웃듯 에펠탑이 보였다.
그 때가 잊혀지지 않는다.
길을 살짝 헤매고 있었고 사실은 좀더 탁 트인, 그러니까 사진이 잘 나올 만한 공터에서 에펠탑을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처음으로 에펠탑을 마주한 곳은 그곳으로 향하는 다리 위였다.
그 때가 잊혀지지 않는다.
유명한 건, 사람들이 사랑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구나. 철탑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구질구질하게 그때서야 수긍했다. 파리와 나의 거리가 좁혀지는 순간이었다. 노래가 크게 한몫 했다.
두 손에 품은 나의 마음을, 너의 곁으로, 너에게로, 다른 누구도 아닌 너에게.
그 뒤로 남은 일정동안 매일 에펠탑을 보러 갔던 것 같다.
낮의 에펠탑은 멋있었고, 밤의 에펠탑은 아름다웠다. 검색으로 결국엔 찾아낸 인셉션 그 다리, 비르하켐 끄트머리에 겁도 없이 앉아 정각의 반짝이를 본다는 핑계로 몇시간씩 머물렀다. 지금 생각하니 뒤에서 누가 밀었으면 아마 그대로 센강에 빠지지 않았을까 싶게 오래도록 멍하니 앉아있었다. 단편적인 기억도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자잘하고 잡다한 생각을 하면서.
그때는 욕심인줄도 몰랐던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길을 걷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는데 에펠탑이 빛나고 있는 일상은 어떤 느낌일까. 에펠탑이 비치는 물비늘은 다른 불빛과는 다르게 다 진 낙엽이 떠다니는 것 같았고, 매 정각에 빛나는 에펠탑의 빛망울은 마치 물비늘을 닮았다. 그때의 에펠탑 아래 물비늘은 다른 건물의 물비늘에 지지 않으려는 듯 힘차게 검은 물결 위에서 하얗고 분주하게 빛났다.
오 그만 더 보고 싶어져서 그만
가끔 니 생각이 나는 걸
아름다웠던 우리
솔직히 매일매일 니생각은 아니지만
가끔 이런 순간이 오면
그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난 그런가봐
그 노래를 들을 때의 나는 에펠탑밖에 볼 수 없었다.
파리가 여행의 마지막이 아니길 다행이다. 이 짙은 아쉬움을 한국에 가지고 갈 용기가 없었다. 다른 여행의 기억으로 덮어버리고 싶었다. 끝까지 겁쟁이었다.
파리의 사진을 보면 아득해졌다. 여기에 내가 있었다니. 이곳을 실제로 봤었다니. 마치 그 로맨틱한 사진들은 실상과는 매우 동떨어진 허구같기도, 아니면 그 자체를 정확하게 담아낸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곳. 낭만적인 것 같으면서도 아닌, 그런데도 낭만적이라고 느껴지게 하는 묘한 곳.
파리가 나의 도시가 아님에 감사한다. 그리워할 수 있는 도시가 파리임에 감사한다. 그곳에서 살지 않아 일상의 파리가 아닌 환상의 파리임에 감사한다. 상상하고 소망하고 염원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그 맛을 안다고, 나는 파리에 다녀와서 더 파리를 그리워했다. 이전엔 파리라는 도시를 궁금해했다면 갔다온 후에는 정각에 반짝거리는 에펠탑을 바라보던 시간과 그때의 기분, 대낮에 테라스에 앉아 마시던 화이트와인, 어떤 거리, 지하철 통로를 무심히 걷던 순간을 그리워했다.
프랑스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렇게까지 좋아하다니 아무래도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다. 한번도 유난스럽게 좋다고 표현한 적은 없었지만 사실은 언제나 좋아해왔다. 위험한 에피소드를 수없이 듣고 일부러 좋지 않은 이야기만 찾아 들었으면서, 심지어 내 입으로 좋은 이야기는 많이 꺼내지 않으면서도 나는 프랑스가 좋았다. 뭐가 좋은지도 모르면서 겉모습만 보고 열렬히 마음을 바치지만 최선을 다해 호감을 부정하고 동시에 동경하는 것. 그래, 마치 서툰 짝사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