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그 진부한 낭만에 대하여
파리에서 밤을 샌 적이 있었다. 재즈 클럽도 아니고, 밤새 술을 기울이는 바도 아닌 숙소에서였다. 사실은 좀더 로맨틱하게 밤을 보냈으면 어땠을까 문득 바라기도 했건만 나는 파리 북쪽 구석에 있는, 낡지만 아늑한 그 작은 집에 혼자 있었다. 분명 하루종일 걸어다녀 피곤한 상태였는데다가 따뜻한 물로 샤워까지 했는데 막상 침대에 누우니 눈이 전혀 감기질 않았다. 아마 낮에 마신 커피 두 잔 때문인 것 같았다. 가만히 누워있다 보니 지겨워져서 작은 조명 하나를 켜고 조용한 노래를 틀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지만 전혀 졸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내일을 걱정하면서 노란 조명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흰 벽과 아주 천천히 붉어지는 창밖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고장난 벽시계는 12시 35분에 멈춰있었다. 깊은 새벽, 그 시계처럼 순간 이 방의 시간이 멈춘 듯했다. 한쪽에만 늘어놓은 조명때문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 커튼과 벽에 걸린 소품들, 크지 않은 창문과 어두운 탓에 실루엣만 보이는 지붕, 낮에는 몰랐던 조명의 밝은 빛, 그 빛에 환하게 형태를 드러낸 위인전과 액자, 꽃병, 세면도구 따위들. 커튼과 가구, 벽에 붙은 사진들은 내 손을 탄 것이 아니기에 유독 생경한 새벽이었다.
파리에, 이 공간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 멈춘 시간을 이따금씩 현실로 돌아오게 한 건 창문 밖으로 스치는 새들의 날개짓과 노래의 흐름이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 노랫소리 사이로 빗소리가 끼어들었다. 그 모든 것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으니 시간이 흘렀다. 보통 원하지 않게 밤을 새는 시간은 고통스럽기 마련인데 아무 느낌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를 멀리서 내려다보고 있다고 느꼈다. 현관과 부엌이 붙어있고 벽 같지 않은 벽으로 나누어져 있는 그 공간 속에 멀뚱히 누워있는 나를 위에서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그저 그뿐이었다. 조명빛이 점점 옅어지고 창문 밖에 희끄무레하게 밝아왔다. 동시에 배가 고파왔다. 아마 오늘은 잠을 자기가 글렀다고 생각했다. 사실 다음 날 특별한 일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 까무룩 잠들었다가 내킬 때 일어나면 될 일이었다. 당장 닥친 걱정 없이 그렇게 밤을 새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