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본질
성실한 학생은 아니었지만 학교수업에서 잊히지 않는 배움 중 하나는 관광지를 '연극무대'로, 그 무대를 보며 즐거워하는 관광객은 '우스꽝스런 관광자'로 비유한 대량관광의 학문적 관점이었다. 관광객은 책이나 영화 따위에서 습득한 여행지의 정보를 자신만의 환상으로 재해석해 구축해놓고, 여행에서 자신의 환상을 충족시키기를 원한다고 했다. 관광객은 그의 '환상'과는 다른 여행지의 '실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며, 오히려 자신의 '환상'과 어긋나는 장면은 의도적으로 보지 않으려 한다. 스스로 만들어낸 환상을 '실제로' 보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지갑을 열지만 이미 자신의 세계에서도 지긋지긋한 현실은 여행에서만큼은 절대 마주하려 하지 않는다.
관광산업은 관광객의 그러한 욕망을 놀라우리만치 잘 파악해서 관광지를 하나의 '테마파크'로 조성한다. 그곳에 실제로 거주하는 현지민들은 대개 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반자발적으로 기꺼이 배우가 되어 관광객의 환상을 깨뜨리지 않게 최선을 다한다. 이제는 가늠하기 어려운 고리타분한 시절 이야기겠지만 아프리카 대륙의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서는 패키지투어 시간에 맞춰 동네에 당연히 자리잡은 전기며 도시가스 시설을 잠시 뒤로 하고 관광객 앞에서 장작불을 때운다든가 나뭇잎 등으로 집을 꾸미며 그들의 '환상'을 견고하게 만들어 준다고 했다.
그렇게 글로벌 관광시대가 새롭게 열어젖힌 관광제국주의를 꼬집으며 관광 수출국의 수익구조라든가 관광 수입국의 교만한 권력, 관광객들의 단단한 편견 등을 나열한 국제관광학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학문적인 관점에서 분석한 내용이므로 어느정도 실무와 동떨어진 신랄함이 있었다는 것을 감안해도 여행을 좋아한다고 말하던 내가 얼마나 얇은 표면만 훑고 있었으며 내 입장에서만 여행을 바라봤는지 의도치 않게 밝혀진 계기였다.
우리는 여행을 왜 떠나는 걸까. 또는 우리에게 여행은 뭘까. 미리 정해둔 일정과, 숙소와, 방문할 장소를 그대로 계획에 맞게 착실히 수행하는 것. 하나씩 계획을 짜고 자료를 모으며 상상하고 예상했던 모든 기대가 맞아 떨어져야 하는 것. 정보를 긁어 모아 가장 좋을 만한 장소들을 사전에 수집하는 것. 굳이 돈을 쓰고 시간을 써서 떠나기 때문에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야 잘 다녀 왔다고 평가하는 것. 이제는 현대인의 미덕이라 자조되는 삭막함은 여행에서조차 퍽퍽한 존재감을 내뿜는다. 여행에서의 경험을 비교하고 분석하며 가공한다. 절대 같을 수 없는 여행을 부러워하고 안타까워한다.
현지민은 자의든 타의든 일정한 수입을 보장받기 위해 일상을 전시하거나 꾸미거나 어느 정도의 불편을 감수하는 구조 속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이 불편하다. 이제는 불편한 감정을 보이는 것조차 시혜적인 태도가 아닐까 의문스럽다.
잘못된 건 없다. 모두가 그렇듯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힌 세상에서 어느 하나만을 탓하기에는 일이 더욱 복잡해진다. 나는 우등생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끈기있게 물고 늘어지며 매사에 열심인 학생은 더더욱 아니었지만 번듯하게 세워진 이 모순적인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면 덜 무해할지, 무엇을 실천하면 모두가 조금은 힘을 빼고 즐거울 수 있을지 아직도 종종 고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