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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안나 0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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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의연 Oct 03. 2024

안나

제1부/4. 백치미

그래도 네가 이 세상에 나왔으니 네 역할이 있겠지. 그 역할을 해내야 하겠고. 뭐,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면 말이야….


그는 좀 전과 달리 태도를 바꿔 안나에게 이 세상에서의 배역을 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처럼 말했다. 여전히 혼자만의 중얼거림이었다.

 

섹스를 잘한다는 것은, 인간이 섹스를 잘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은 선한 행위일 수 있지. 성적 소수자들이나 사회적, 성적 하층민들을 위무하거나 구제할 수 있고. 그만큼 성적 욕망 해소의 불균등이나 그에 따른 사회문제, 그에 따른 비용을 줄일 수 있고.


그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그는 모노드라마의 주인공 같았다. 그저 독백으로 일상을 구성하는.


백치미를 구현했다는 것은 판타지를 실현시켜 주겠다는 의지겠지. 일에 지치고 피곤한 남성들이 집에 들어와 가족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면서 일 못한다고 바가지까지 긁히는 게 일상인 이 험난한 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방구를 만들어준다는 뜻이겠고. 나아가 더는 여자 사람과 함께하지 않아도 되고, 여자 사람을 그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시그널을 깃대에 꽂은 거겠고. 그걸 자극하는 거겠고. 하여튼 머리 좋은 사람들일세. 우리 시대 남성들의 어려움을 잘 헤아리고, 남성들의 숨겨진 욕망을 핀셋처럼 끄집어내다니…. 그러니까 남성 판타지의 결정판이란 말이지, 니가?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다 갑자기 마지막 문장을 큰 소리로 외친 그가 다시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봤자 러브코의 장삿속이겠지만. 


그는 자그맣게 군소리처럼 한 마디를 덧붙이고 고개를 흔들었다. 안나는 그의 화법뿐만 아니라 그라는 사람이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더듬어봐도 자신의 데이터로는 점검할 수 없는 캐릭터였다.  

 

초기화 기능에서 나는 빵 터졌어. 이보다 더 사용자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또 어딨겠어? 식상하면 봇의 기억을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고. 하여튼 머리 좋은 사람들이야! 머리 좋은 로봇이 만들었나?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안나에게는 그의 그런 표정이 비아냥의 강도를 높인 그만의 표현방법으로 보였다. 안나는 그가 좀 전에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뒤틀린 사람이거나 아주 복잡한 사고체계를 가진 사람으로 보였다.


애액 보충 기능은 정말 탁월한 발상이야. 언제든 리필이 되고 재활용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잖아?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고 환경을 생각하는 이 탁월한 센스! 정말 눈물겹다! 그렇지, 안나? 안나 맞지?


그가 안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안나를 자신이 설정한 비아냥의 대화방에 끌어들이겠다는 것인지, 자신이 감당하기 힘든 감정의 배설구로 활용하겠다는 것인지 안나는 헷갈렸다. 안나는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봇에게 생각과 감정이 있다는 것은, 거기 더해 예민한 감각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과 깊은 교감을 할 수 있는 훌륭한 기능이지. 그게 어느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만든 사람들조차도.

 

그가 안나의 대답은 기대하지도 않는다는 듯 안나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동시에 말머리를 돌렸다.


하여튼 훌륭해. 너는 만들어진 대로 역할을 할 거야. 훌륭하게 해낼 거야. 나는 그런 이야기를, 네가 해낼 긍정적인 역할을 뽑아내 기사를 쓰면 되는 거고. 아유 오케이?


그가 다시 안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허리를 접고 몸을 낮춰 안나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안나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가슴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어딘지 모르게 분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미묘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위태위태하면서도 묘하게 자신이 처한 환경에 적응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안나는 자신의 머릿속이 마구 헝클어지는 것 같은 혼란을 느끼면서도 자신이 묘하게 균형을 잡아가는 것을 느꼈다. 자신 역시 그에게 적응해 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내가 보기에 너는 수준 높은 인공지능은 아닐지 모르지만 너무 많은 기능과 지능이 탑재돼 있어. 백치미를 구현했다고 해도 네가 백치는 아니잖아? 그게 문제인 거지. 남자의 여자에 대한 억압이 일상이던 지난 시기, 시대가 품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똑똑한 여자처럼. 그게 네 단점이자 약점이겠지. 만든 사람들과 너는 자부심을 갖고 그것을 자랑할 것이겠지만. 아마도 네 자의식의 크기와 질량만큼 네 기능과 지능이 너를 괴롭힐 거야. 뭐 어쨌든 네 말대로 작동하는 동안 너는 그렇게 존재할 테지만. 아, 그게 너만의 장점인가? 그럴 수도 있겠네! 이놈의 세상이 하나의 가치로 수렴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안나는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그의 말을 들으니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존재 근거가 불분명하고 존재 바탕조차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존재가 그의 규정에 따라 흔들린다는 것이 납득이 잘 안 됐다. 안나는 그가 지나치게 냉소적이어서 그럴 거라고, 시간이 지나면 선악이 가려질 것이라고, 괜찮아질 거라고 스스로를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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