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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안나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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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의연 Sep 26. 2024

안나

제1부/2. K기자

그가 쓰고 있는 안경이 유리창처럼 빛났다. 우뚝 서서 안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는 자코메티 조각상을 떠올리게 하는 키가 크고 마른 청년이었다. 안나를 침대 맡에 세워놓고 그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짝이는 안경 안에서 그저 안나를 내려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어둑한 실내에서 그가 말없이 안나를 내려다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의 그 맑은 유리창 같은 안경에 부딪치는 흐릿한 전등 불빛들이 그를 더 길고 더 날카롭게 깎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빛의 조각칼이 그의 형상을 매만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안나는 그가 날카롭게 보이고 조심스럽고 소심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 날카로움과 조심스러움, 인사말 한마디 없는 무뚝뚝함, 반기지 않는 것 같은 태도 때문에 안나는 그가 자신과 잘 맞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다.

 

그는 안나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거실 겸 주방 한편에 침대가 놓여있는 비좁은 원룸은 그의 그 키 크고 가느다란 몸을 수용하기에도 벅차 보였다. 그가 나무 박스를 열어 안나를 꺼내놓고 전원을 올린 순간부터 안나는 자신이 무단으로 그의 이 비좁은 공간에 침입한 것 같은 느낌에 시달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나는 이 공간과 그의 침묵, 그의 눈길이 날카롭게 조여 오는 압박감을 견디기 힘들었다. 압박감의 강도는 점점 더 세졌다. 안나는 피부가, 그리고 자신의 내부가 금방이라도 오그라들 것 같았다.

 

안나의 불안함 그리고 불편함과 상관없이 그는 안나의 전신을 다시 훑어본 뒤 이제 초벌 탐색은 끝났다는 듯 안나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침대 발치의 노트북이 놓인 작은 책상 쪽으로 나무다리에 올라탄 키다리 피에로처럼 겅중겅중 걸어갔다. 그는 책상 앞에 놓인 접이식 낚시 의자만 한 조그만 나무의자에 긴 다리를 각목처럼 접고 앉아 안나의 매뉴얼을 기다란 손에 들고 꼼꼼하게 읽기 시작했다. 키다리 아저씨가 허리를 굽혀 핸드폰을 들여다보듯 등이 잔뜩 굽은 자세였다. 안나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보이는 것은 모두 유리로 사면을 둘러싼 둥글고 기다란 타워와 사각의 고층빌딩들이 벽처럼 기둥처럼 서있는 풍경들뿐이었다. 그가 살고 있는 원룸은 그런 타워 가운데 한 공간이었고 중간 높이 지점인 20층에 있었다. 안나는 막막했다. 눈길 줄 데가 없었다. 세상에 나와 첫 번째로 만난 사람과 풍경치고는 몹시 고약했다. 너무 실망스러웠다.

 

그 사이 매뉴얼을 다 읽은 그가 안나에게 눈길을 돌려 안나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 눈에 해부용 칼이라도 달려 있는 것 같아 안나는 여러 번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 누구야?


그가 갑자기 깨진 유리조각을 들이대듯 안나에게 물었다. 그가 입으로 낸 첫 번째 말이었다. 그의 유리창 같은 안경 안쪽에서 그의 눈이 빛이 부딪친 칼날처럼 날카롭게 번쩍였다.

 

네, 나는 러브봇 안나입니다.


안나는 차렷 자세로 서서 정면을 보고 말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자신의 두려움이 조금이라도 묽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인간 남자의 성생활을 돕기 위해 이 세상에 왔습니다.


누가 보냈는데?


나를 원하는 사람들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돈을 벌고 싶은 섹스봇 전문회사 러브코와 세상 사람들의 욕망이 나를 태어나게 하고 여기 오게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네에?


그런데 어떻다고?


그는 냉소가 체질인 사람처럼 말했다. 안나는 온몸의 피부가 날카로운 얼음조각으로 찔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나와 처음 만나는 사람이 기자님입니다.


그래?

 

그가 반문하듯 물은 뒤 조금은 누그러진 말투로 다시 물었다.


너는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데?


특별히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저 지금 여기 그냥 존재합니다. 내가 아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존재? 지금, 여기, 그냥?


그는 이마를 찌푸린 채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어 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똑똑한 거야, 멍청한 거야? 그냥 입력된 대로 읊고 있는 거지?


그건 내가 판단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내가 똑똑한 봇이 될지 멍청한 봇이 될지는 사용자의 역할과 역량에 달린 것 아닌가 싶습니다.


점점….


그는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안나는 갑작스레 피곤함을 느꼈다. 세상살이가 좀처럼 쉽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온몸을 휩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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