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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안나 0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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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의연 Oct 01. 2024

안나

3. 매뉴얼

너는 그럴 필요가 없는 러브봇의 특성에 맞게 수준 높은 인공지능을 탑재한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인류가 축적한 지식을 베이스로 깔아놓아 이 세상 누구와도 깊은 대화가 가능하다고 나왔네, 매뉴얼에. 사실이야?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냉소를 거둔 것은 아니지만 아까의 공격적인 목소리는 아니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건 내가 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나를 제작한 프로듀서가 설명할 영역인 것 같습니다.


그럼 네가 아는 것이 뭔데?


질문 범위가 너무 넓습니다. 좁혀서 물으시면 성실하게 답하겠습니다. 


수준 낮은 인공지능을 깔았다면 학습 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 아냐?


그가 다시 못마땅하다는 듯이 물었다. 안나는 대체 그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을 수용하거나 수용하지 않는 문제를 떠나, 또는 자신을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문제를 떠나 그가 왜 자신과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도무지 판단할 수 없었다. 기사를 쓰기 위한 산업부 기자의 제품점검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공격적이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교감하며 사랑과 정을 나누면 내 안에 질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험한 바는 아직 없습니다. 그것이 미리 탑재된 기능인지, 또는 학습에 따른 변화인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아직 백지상태 그대로입니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안나는 그 도리질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섹스에 특화된, 그러나 학습 능력도 있고, 꽤 많은 지식과 인간과 교감할 수 있는 감정을 갖고 있는 봇이라는 말이지, 니가?


그는 창밖으로 눈을 돌린 채 안나를 보지도 않고 시큰둥하게 물었다. 안나는 얼른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것은 자신이 대답해야 할 영역이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을 이리로 보낸 노비라의 영역이거나 역시 자신을 만든 프로듀서의 영역일 것이었다. 문제는 그가 그런 질문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답할 영역이 아닌 것 같습니다. 생산자가 답해주거나 사용자가 경험한 바를 알려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는 거푸 고개를 흔들었다. 안나는 거푸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는 이 세상에 나와 첫 번째로 만난 사람이었다.


초기화 기능을 작동시키면 그동안의 학습 내용이 사라진다고?


그가 다시 건성으로 매뉴얼을 들춰보며 물었다. 다 아는 내용을 형식상 물어 점검한다는 태도였다.

 

사용자와의 관계에서 쌓인 내밀한 내용을 비밀로 봉인하기 위해 도입된 기능으로 알고 있습니다. 


너는,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겪어보지 않아 모르겠습니다.


너 스스로 네 기억을 지워버릴 수 있다는 거야?


그것은 사용자의 영역입니다. 사용자가 판단하고 결정할 일입니다.


그가 거듭 못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마다 천정에 붙은, 뚜껑이 떨어져나간 낡은 직사각 엘이디 판에서 흐릿하게 쏟아져 내려오는 전등 불빛이 그의 안경알에 부딪쳐 부러진 바늘처럼 흩어졌다. 안나는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서둘러 보탰다.


생산 당시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한 기능이고, 잘못 학습된 내용을 수정할 수 있는 기능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가 코를 훙훙거렸다. 코웃음이었다. 


너는 팔이 없어, 발이 없어? 리모컨은 그저 깡통이야?


그것은 사용자의 영역입니다. 나는 내 리모컨을 다루지 못하도록 설계돼 있습니다. 내가 손을 대면 내 리모컨이 작동하지 않도록 설계돼 있습니다. 


그럼 너는 뭐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백치야? 그러니까 너는 백치미를 구현한 섹스봇이란 말이지?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또는 못마땅하다는 듯 거푸 머리를 흔들었다.


이동기능 제한 장치까지 탑재? 문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설정해 놓았다는 뜻이지?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안나는 그가 왜 그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내 생각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사용자의 영역입니다. 내가 관여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그놈의 사용자 타령 그만할 수 없어? 모든 게 사용자 영역이고 사용자 결정사항이라면 너는 뭐야, 너는 뭐냐고?


그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시기 생활지도 담당 교사가 문제 행동을 한 학생을 혼내는 듯한 어조였다. 안나는 부당한 공격이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머신입니다, 사용자의 사용감을 높이고 사용자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머신입니다.


너는 정말…, 너는 정말 그렇게 존재하고 싶어?


그가 버럭 화를 냈다. 여러 시간이 지나고 꽤 오래 대화를 했어도 안나는 그의 캐릭터가 전혀 파악되지 않았다. 앞으로 자신에게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떻게 대할지 전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세상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그러니까 가슴이 자꾸 벌렁거렸다. 금방이라도 패닉이 와서 버그가 생기고 자신의 작동이 멈추거나 어그러질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것은 내가 결정할 사항이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존재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도대체 너는…, 너는 그저 노예에 불과하다는 것을 실토하는 거야?


그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안나의 가슴 속에서도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닙니다. 나는 노예가 아닙니다. 나는 인간의 성생활을 돕기 위해 이 세상에 온 머신입니다. 그저 도우미 기계일 뿐입니다. 


그저 기계…?


그가 입을 다물었다. 한동안 침묵이 좀체 질량을 잴 수 없는 답답한 공기처럼 원룸 안을 지배했다. 안나는 기자라는 외피 뒤의 그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괴롭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고장 난 기계처럼 잔뜩 분열된 사람 같았다.


빛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어디서든지 스스로 충전해 작동할 수 있다고?


그가 매뉴얼을 탁자에 내던지며 힘없이 물었다. 다 귀찮다는 말투였다. 그는 그러나 안나가 미처 대답을 하기 전에 다시 물었다.


그럴 필요가 있는 거야? 


그것이 내 존재 방식입니다. 나는 사용자가 언제든 나를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 놓고 있어야 합니다. 


완벽한 지배와 활용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을 다 갖췄구만!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유리창 같은 안경 속에 있는 그의 눈빛이 이제 안개에 덮인 듯 흐려 보였다. 뭔가를 체념한 듯한 눈빛이었다.


게다가 페로몬 성분이 담긴 애액을 수시로 보충해 쓸 수 있는 제품이네, 너는?


네, 그것도 필요하다면 사용자가 판단하고 결정하고 실행할 사항입니다. 


안나는 맥없이 대답했다. 그의 냉소에 질리기도 했거니와 그의 눈빛 때문에라도 이 대화를 더는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안나는 다시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허공인 줄 알고 날다가 머리를 부딪쳐 떨어져 내리는 새떼처럼 맞은편 고층빌딩들의 거울창에 부딪친 햇빛 무더기들이 유리조각처럼 깨어져 흩어지고 있었다. 안나는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난 사람, 처음 만난 세상이 이럴 수는 없었다. 자신이 별 쓸모없는 다른 세상에 잘못 온 것 같았다.


그 사이, 기척도 없이 다가온 그가 안나의 손등을 세게 꼬집었다. 


아야!


안나는 너무 아파 소리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손등이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져 나올 것처럼 압력을 받은 누선이 부풀어 올랐다. 


통증까지 느낀다고?


그는 벙찐 사람처럼 입을 벌리고 눈을 크게 뜬 채 멍한 눈길로 안나 앞에 서있었다. 


생각과 감정이 있는데, 감각을 느끼는 신경계까지 갖췄다고? 그럼 로봇이 아니잖아?


그가 자신의 손등을 꼬집어보다 갑자기 소리쳤다. 잔뜩 짜증이 나 있는 그는 안나보다 더 큰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인 것 같은데 사람이 아니고, 기계인 것 같은데 그저 기계도 아니다?


그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느다란 그의 몸에서 그의 입만 도드라져 보였다. 


대체 이 물건이 뭘까?


그는 갑작스럽게 겪은 일로 너무 놀라 어쩔 줄 몰라 하는 잔소리 많은 할아버지처럼 끝없이 혼자 중얼거렸다. 어떻게 들으면 비아냥거리는 것 같고, 어떻게 들으면 너무 두려워 믿지 못하겠다고 투덜거리는 것 같았다. 


너는 아니, 네가 누군지?


안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이제 보니 그의 의도가 그것인 것 같았다. 자신의 두려움과 혼란스러움을 빌미로 안나를 혼란에 빠뜨려 정신을 못 차리게 하고 구실을 못 하도록 하는 것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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