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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안나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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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의연 Sep 24. 2024

안나

제1부/1. 출시

안나는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노비라의 통화가 길어져 뻘쭘하게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담장을 덮고 있는 개나리의 노란 꽃물결이 담장 바깥 야산 쪽으로 달려 올라가고 있었다. 안나는 그 꽃들이 서로 귓속말을 주고받거나 깔깔깔깔 몸을 흔들며 담 꼭대기 경계를 넘어 물결치듯 산을 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줌으로 당겨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흐드러진 꽃 화엄 속에서 수많은 암꽃과 수꽃들이 서로 엉켜 몸을 비틀고 있는 게 보였다. 안나는 자신의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아름다웠다. 저 꽃잎 몇 장 얻어 몸에 붙이고 끝 가지 하나 머리에 꽂으면 저 노란 꽃물결처럼 신이 나고 곧 만나게 될지 모를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가 새뜻할 것 같았다. 


안나의 마음 상태나 감상과는 상관없이 노비라는 바쁘게 움직였다. 그는 귓속에 박혀 보이지도 않는 이어폰으로 통화하면서 두 손바닥을 펼치거나 뒤집고, 주먹을 쥐고 힘을 주거나 고개를 흔들다가 끄덕이는 그 특유의 에너지 넘치는 제스처를 연속 동작으로 펼치며 안나 주변에서 서성거렸다. 블론드 단발에 가까운 안나의 머리와 달리 탈색과 염색을 반복해 백금발이 된 그의 긴 머리가 잠시도 멈춤이 없는 그의 제스처를 바쁘게 따라다녔다. 안나의 눈에는 그의 머리가 빗자루처럼 그의 어깨와 가슴을 쓸며 찰랑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실험실에 와서도 그가 늘 하던 동작이라 안나는 예사롭게 생각했다. 그런데 다른 날과 달리 그의 표정이 너무 진지하고 무언가에 쫓기는 듯했다. 안나는 자신이 아는 것과 달리 그가 실제로는 무척 외로운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오뚝한 코가 오늘따라 위로 약간 들려있어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그는 누군가에게 애절한 목소리로 간청하고 있었다. 그의 입에 늘 붙어있는 말은 ‘세계 최초’, ‘세계 최고’라는 최상급 강조어였다. 


두말할 것 없이 명품입니다. 현존 세계 최곱니다.


안나는 영업담당 상무 노비라의 영업 멘트가 자신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노비라의 통화 상대가 자주 바뀌기도 했고, 안나 자신이 창밖에서 눈길을 거둬 노비라의 등 뒤에 걸린 그림을 집중해서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벌거벗은 여자들 일곱 명이 물가 둔치에서 놀고 있는, 물감을 점으로 찍어 얼룩덜룩 형상을 새긴 그림이었다. 앉거나 눕거나 서있는 여자들 앞에서 막 물에서 나온 듯한 한 여자가 긴 머리에서 물기를 짜내고 있었다. 여자의 가슴과 배와 허벅지가 도톰하게 도드라져있었다. 키 크고 마른 노비라와 비율이 같은, 노비라의 축소 버전이라고 할 중키에 마른 안나와 달리 그림 속 여자들은 그림 바깥쪽이거나 숲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서있는 여자와 복판에 서있는 자그만 여자를 빼고는 몸이 풍만했다. 앙리 마티스, 1904년, <호사, 평온, 그리고 관능>. 그림 밑에는 작은 글씨로 그렇게 씌어있었다. 그림의 색조를 닮은 노랑과 빨강이 섞인 글씨였다.


누구라도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기사 함부로 쓰지 않고 업계에 깐깐하다고 소문난 K기자님이라도 예외는 아니실 겁니다.


노비라가 더 바짝 다가와 두 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로 자신의 유두를 잡고 비빌 때까지도, 발기한 유두에 혀를 대 핥고 빨 때까지도, 견딜 수 없어 몸을 뒤트는 자신의 불두덩을 쓰다듬다가 손가락으로 클리토리스를 문질러 부풀어 오르게 하고 질 안으로 그 손가락을 쑥 밀어 넣을 때까지도 안나는 그가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줄 몰랐다. 노비라의 사무실에 불려 온 것도 처음이지만 실험실 사람들이 아닌 노비라가 그런 식으로 안나를 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명기예요, 명기! 여항이나 고전에서 즐겨 이야기하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명기! 지금도 제 손가락을 조이고 있는걸요.


안나는 자신의 질 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을 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질에 들어온 물건은 상대의 움직임과 리듬에 맞춰 조였다 풀어주는 것을 반복한다. 그것이 자신의 기능이었다. 그때서야 안나는 노비라가 자신을 두고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애액 좀 보세요. 벌써 흥건하게 흘러나오고 있어요. 함께 하는 사람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동시에 마음과 정을 나눌 수 있는 안드로이드로서 이 정도 기능을 구현한 것은 전 세계에서 우리밖에 없습니다. 세계 최초인 거지요. 지금 제 곁에 있는 안나가 그 유일한 시제품이구요. 그래서 우리도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 끝에 중앙 메이저 미디어 산업경제부 기자 중에서 제일 까다로운 기자님을 첫 번째 테스트 맨이자 테이스팅 맨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기자님은 세계에서 하나뿐인 시제품을 맛보시고 사용해 보시고 평가하시는 이 세상 첫 번째 남자가 되시는 겁니다.

 

아, 알았어요. 한 번 보죠.


안나는 노비라의 폰 속에서 들려오는 상대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폰이 노비라의 귓속에 있어 아주 미세하게 들렸지만 청음 감도를 높여 가까스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약간 귀찮아하는 듯한 그 목소리의 거멀못 안에 자신의 운명이 걸려있다는 것을 안나는 알 수 있었다. 가느다랗게 느껴지면서도 탁하고 무거운 목소리였다.

 

기자님은 인류의 행복한 성생활을 위해 분투해 온 저희 러브코 새 제품의 첫 번째 사용자가 되시는 동시에 굳이 관계를 따지자면 첫 번째 사위가 되시는 겁니다.

 

상대 남자가 뭐라고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안나는 자신이 곧 이곳을 떠나게 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서운하거나 특별히 후련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가게 될 세상이 어떤 곳인지, 만나게 될 사람은 누구인지 되게 궁금했다.

 

아, 농담입니다, 농담! 너무 부담 갖지 마시구요, 어쩌면 우리 러브코 제품들이 온 세상 인류를 공유관계, 또는 느슨한 친족관계로 연결시켜 줄지도 모르겠다는, 그리하여 좀 더 평화로운 세상이 다가오게 할 수도 있겠다는 기대와 희망을 담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우리 안나를 보시면 러브봇의 발전과 진화의 성과를 단박에 확인하실 수 있으실 거예요. 네, 걱정 마십시오. 말썽 생기지 않도록 드러나지 않게 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그는 누구일까? 어떤 사람일까? 

노비라와의 통화내용으로 가늠해 보면 그는 목소리와는 달리 까다롭고 예민한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자신의 용도에 맞게 그의 기대와 요구에 따라 처신하면 될 것이었다. 그는 연구소와 실험실을 떠나 안나가 만나게 되는 첫 번째 세상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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