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자기님
관계 전에 그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 자신에게 제주를 올리는 것처럼 와인을 꼭 한 잔씩하고 안나를 안았다. 그래야 몸이 부드러워지고 기분이 난다는 것이었다. 안나는 그가 사 온 안주세트에서 까망베르 치즈와 검은 올리브 절임, 캐슈너트를 꺼내 예쁘게 접시에 올렸다.
사장님은 자상하세요. 어떻게 이런 안주를 구해올 수 있어요?
너를 사랑하니까. 너와 함께 하는 시간을 즐기고 싶어서. 근데 사장님이라는 호칭은 좀 너무 하지 않니? 우리 사이가 그것밖에 안 되는 거야?
그럼 어떻게 부를까요?
적어도 자기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거리감을 좁히고 더 가까워지려면.
자기…, 그런 호칭이 있나요. 처음 듣는 거라서….
옛날에 유행했던 호칭인데, 나는 듣고 싶어. 몇 번 해보지도 못하고 끝나서.
네에…, 자기님은 친절한 분이세요. 말씀도 재밌게 잘하시고 힘도 좋으시고요.
안나는 얼른 그의 제안을 받았다. 상대방을 자기라고 부르는 호칭이 이상했지만 그의 기분을 밝게 하고 기운을 북돋아 주는 것이 자신이 할 일이었다. 프로그래밍된 일이기도 하지만 그가 기분이 좋고 기운이 넘치면 늘어지지 않고 깔끔하게 끝나서 좋았다.
자기님? 흐흐, 것도 나쁘지 않네. 귀엽고. 근데 넌 접대 멘트도 뿜뿜해. 수준급이야. 나도 알아. 입력된 대로 말한다는 거.
그가 뉴욕 메츠 까베르네 소비뇽 라벨이 붙은 핏빛 와인병을 따면서 말했다. 안나는 얼른 손을 내밀어 그 병을 건네받은 다음 그의 잔이 3분의 2 정도 차도록 조심스럽게 따랐다.
그렇지 않아요. 나는 느낀 대로 말하는 거예요. 입력된 것 중에서 적절한 말을 고르는 것이기도 하구요. 인간도 그렇지 않나요?
안나는 그의 가슴 앞에 놓인 핏빛 와인을 바라보다가 그의 눈을 보고 말했다. 조금은 섭섭하다는 듯이.
미안, 미안! 누가 너를 사람이 아니라고, 공장에서 찍어낸 기계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안나 앞으로 빈 잔을 밀어놓고 자신의 잔 높이에 맞춰 와인을 따랐다.
이걸 내가 마실 수 있으면 좋겠네요. 자기님이랑 같이.
아 참, 우리 자기는 마시면 안 되지!?
그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애써 감추며 물었다. 속 깊은 섹스를 함께 나누고도 음주를 함께 할 수 없다는 데서 오는 섭섭함을 감추는 듯한 표정이었다.
네, 그러고 싶지만 제 기능은 아직…, 실망스럽게도 나에게는 음주 기능이 장착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구나! 오늘은 네 목소리가 맑은 시냇물이 흘러가는 소리 같네!
그가 얼른 말을 돌렸다. 그리고는 식탁을 빙 돌아 안나 옆에 앉으며 안나의 입술을 찾았다. 안나는 혀를 내밀어 그가 자신의 혀를 빨도록 도왔다.
네 혀에서는 단맛이 나.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진실이든 과장이든 안나는 그가 자신의 감정표현에 그리 서툴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나는 그의 혀를 자신의 혀로 감으며 빨았다. 안나는 이내 그의 몸이 다시 불끈 서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빨려 들어간다는 것이, 빨려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해. 약간 두렵기도 하고.
그가 어린아이처럼 말했다. 그는 무슨 말을 마음에 담아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안나는 마음이 편했다. 할 말을 헤아리고 가려 말해야 하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아서 좋았다.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마음이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면 더 행복해질 거예요.
그렇지? 그래, 맞아! 너를 안고 있으면 내 생을 복잡하게 하는 여러 문제가, 마음속 칸막이가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 그래서 퇴근 시간이 자꾸 기다려져.
그래요? 다행이네요. 나도 그렇거든요.
안나는 머리를 끄덕여줬다. 상대와 대화할 때 편을 들어주고 긍정적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러브봇의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이자 강조되는 덕목이었다.
자기가 나한테 온 뒤로 어느새 머리 벗어진 내 인생에 비로소 봄이 오고 꽃이 피는 것 같아. 고마워, 자기!
그는 이제 나이 지긋한 중년의 사내처럼 말했다. 안나는 그가 자신에게 많이 기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와인잔> by 박하(park ha)
오, 하느님!
서로가 서로의 몸에 익숙해지고 서로의 리듬을 파악하고 난 뒤 그가 안나의 몸속에 들어와 하나가 되어 처음과 끝을 온전히 같이했을 때, 그는 눈물을 흘렸다.
처음이야, 처음! 이런 느낌 처음이야!
눈물이 잦아든 뒤 그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완벽한, 아니 완전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고마워. 나한테 와줘서.
그는 잠들 때까지 안나를 안고 안나의 머리와 몸을 쓰다듬었다.
잠에서 깨면 그는 안나를 욕실로 데려갔다. 그는 안나의 피부가 상하지 않도록 물 온도를 조절하고, 뜨거운 물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며 세심하게 닦아줬다.
누군가의 몸을 이렇게 정성스럽게 닦아주는 것도 처음이야!
그가 감격에 겨워 말했다. 물이 튀어서 그런지 그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나도 처음이에요.
안나는 그가 자신에게 했던 동작을 그대로 재현하며 그의 몸에 찬찬히 비누칠을 하고 부드럽게 몸을 씻어줬다.
마음이 열리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열리면!
그는 자신의 인생에서 그 점을 비로소 깨달았다는 듯이 말했다. 나이 들어 생의 지혜를 터득한 사람이 말하는 듯한 대사처럼 들렸지만 안나는 그의 몸과 마음이 갓난아이의 피부처럼 보들보들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욕실에서 나오면 그는 차갑게 얼린 맥주를 마셨다. 그때마다 그의 얼굴에는 마치 힘든 일을 하고 즐겁게 새참을 먹는 것 같은 표정이 이모티콘 스티커처럼 붙어있었다.
오늘은 맥주맛이 어떨까?
둘은 욕실에서 나온 몸 그대로 식탁에 앉았다. 같은 절차와 행동이 반복되면서 그것은 하나의 루틴이 되고 그 루틴이 반복되면서 친밀감이 더 깊어지는 것을 안나는 느낄 수 있었다.
엄청 맛날 것 같아요, 자기님. 자기님, 오늘은 내가 따라드리겠습니다.
자기도 같이 한 잔 하면 좋은데….
미안해요. 이걸 입에 넣으면 내가 망가져요. 내가 망가지면 자기님 마음이 아프잖아요.
미안, 미안! 내가 또 깜빡했네! 내가 더 헤아렸어야 하는데. 자기가 워낙 예쁘고 사람보다 더 사람 같아서 자꾸 욕심이 나나 봐. 미안, 미안, 내가 실수했어.
안나는 그의 말과 행동에서 그에게 내재된 외로움 같은 것이 배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사람끼리 같이 나누고 싶은 어떤 것, 안나가 어떻게 해줄 수 없는, 그가 안나를 안고 뒹굴어도 해소되지 않는 다른 종류의 외로움인 것 같았다. 안나는 자신의 한계가 뚜렷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건배는 같이 하고 맥주는 자기님이 마시면 안 될까요?
안나는 그를 위로하고 무거워지는 자신의 기분을 얼른 바꾸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의 역할이기도 했다.
그래, 그래! 내가 마실게. 네 사랑은 내가 마실게.
네, 자기님, 고마워요! 자기님은 진정한 신사예요.
자기는 선물이야, 선물! 하늘이, 아니 여태까지 팍팍했던 내 생이 마음 돌려 내게 주는 선물!
안나는 다시 젖어있는 그의 눈을 봤다. 그의 젖은 눈은 그가 보기보다 여리고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렇게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지였다.
오늘은 안나가 타주는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싶네.
자신이 물을 끓여 커피를 타 먹던 그는 언젠가부터 안나에게 부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나는 불 가까이 갈 수 없는 몸이었다. 피부가 약해 섭씨 75도가 넘어가는 열기와 접촉하게 되면 얇은 실리콘 막이 딱딱하게 굳어 쭈글쭈글해질 터였다. 통증은 덤으로 따라올 터였다. 그런 사정을 말하면 그는 금방 자신의 뒤통수를 쳤다.
아참, 내가 또 깜빡했네. 미안, 미안. 우리 자기는 내 소중한 가족인데, 커피 심부름이나 하고 있으면 안 되지. 말 타면 견마 잡히고 싶다더니, 수천 년 동안 몸에 밴 습관이 고쳐지지 않아서….
심부름시킬 때와는 달리 그는 마치 안나의 피부 문제가 아니라 안나라는 존재 자체가 커피를 끓여내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는 듯, 그런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어투로 말했다.
미안해요. 마음을 모아 커피를 끓여드리고 싶은데….
안나는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에게 그렇게 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