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내 삶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음을 느낀다. 그래서인지 무엇을 보고 즐기던 그 관점은 늘 나를 따라다니고 나의 시선에 개입한다. 영화를 볼 때도 다르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리뷰를 적을 때라고 다를까...
하지만 이번 영화는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만 해도 하고픈 이야기와 별로 다르지 않은 영화다. 이 영화는 그런 영화였다. 아니, 나에게는 그렇게 다가왔던 영화였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하려나.
퍼펙트 데이즈 포스터 중(편집)
자신에게 허락한 최소한의 것들만을 사용하고, 자신이 선택한 최소한의 대상과 소통하며, 자신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최대한 성실하게 살아가는 히라야마였다. 우선적으론 화장실 청소부라는 직업적 특성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지만 결국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그의 모습이자 삶에 대한 그의 태도였다. 많은 이들이 청소부 역할을 놀라울 정도로 현실감 있게 수행한 배우를 칭찬한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에게 청소복이 아니라 운전복을 입혔어도, 아님 다른 작업복을 입혔어도 결국 우린 히라야마란 사람에게서 동일한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시나리오라는 테두리를 넘어 우리에게 정말 현실감 있게 다가온 히라야마란 사람의 존재감이 생생했던 영화였다.
그렇기에 단지 일어나고, 출근하고, 정해진 일을 수행하고, 퇴근하고, 씻고 밥먹고 책을 읽다 잠드는 단순한 일상의 반복임에도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잔상처럼 머릿속에 남는다. 아주 작은 부분까지 세세하게 표현된 청소라는 행위가 역할과 인물을 구체화시키고 신뢰감을 더해준다면, 그와 달리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그의 사연 많은 인생사는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성당의 커다란 문과 같았다. 그의 삶이 매우 독특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객들은 히라야마라는 사람의 일상에 자신의 모습과 삶의 의미들을 포개어보곤 하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별 것 없었던 그의 일상이 남긴 힘은 생각보다 묵직했다.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었던 한 청소부의 일상이 일견 구도자의 수행과 겹쳐 보이기도 했다. 아마도 히라야마가 그런 삶을 통해 고통과 번뇌로부터 해방되는 삶을 살아간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과 번뇌... 모두가 이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퇴근길 정체된 도로보다 훨씬 더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이 인생길의 냉정한 현실이자 삶을 운전하기 어려운 부분일 것이다. 특히 나이가 하나씩 늘어가고 인생의 책임이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더욱 그래 보인다. 히라야마의 삶이 우리에게 자꾸 무언가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짊어진 인생의 짐이 무거울수록, 걸어왔던 시간이 길수록, 또는 걸어왔던 길이 험난했던 사람일수록 대부분 마음속 한구석에 어떤 식으로든 자리 잡고 있는 소망의 한 지점이 존재할 것인데 청소부 히라야마의 일상이 그 부분을 말없이 정확하게 건드린 모양이다. 그의 일상에서 알게 모르게 뭔가 끌림을 느끼며 우리는 다시금 생각했을 것이다. 나에게도 고통과 번민 없이, 소소한 기쁨으로도 충족되는 생활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그런 완벽한 날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 것인지...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중(편집)
'완벽한 날'은 회사의 연말 달성 수치처럼 그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인생 목표는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 제목은 영화적 제목일 뿐 히라야마의 의식 속에 구현된 타이틀은 아니다. 다만 히라야마라는 인물의 삶에는 분명하게 나타나는 어떤 지향점이 존재한다. 유투브 채널에 가끔 집과 관련된 컨텐츠가 올라오는데 대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지방 어딘가로 내려가 집을 짓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꼭 등장하곤 한다. 흥미로운 점은 그렇게 내려간 이들 중 상당수는 비슷한 이유와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의외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 중의 하나는 "일단 무작정 내려왔어요."나 "건강 때문에요."다. 무작정이란 말은 무계획과 겹치는 부분이 많고 대책 없음도 포함하고 있기에 일반적인 경우라면 철없는 행동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허나 우린 들리는 대로만 해석하진 않는 모양이다. 자연스럽게 저 행간 어딘가에 표현되지 않은 의미들이 숨쉬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감추지도 않았던 그 의미들, 대단치도 않은 인생살이 쪼끔 경험해 봤다고 저 이유 너머에서 아른거리는 필연의 그림자가 가늠이 된다. 무계획처럼 보이는 저 결정이 어쩌면 막다른 길에서 찾은 최후의 피난처일 수도 있겠음을 말이다.(물론 그것도 '집을 지을 돈'이라는 조건이 붙긴 하지만..)
피난처의 핵심은 계획성에 있지 않고 그 필요성에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간혹 갑작스럽게 찾아가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인생의 중대한 결정이 의외로 허무하리만치 단순한 결정과정을 통해 내려지기도 하는 것이 우리들 인생사의 한 단면이지만 바닷물 표면과 심층이 다르듯 그 내면까지 찬찬히 들여다보면 겉에서 바라보던 모습과는 다른 다양한 층위가 존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때때로 목적 없이 떠나는 여행도 뒤돌아보면 마음속 깊은 갈망의 외침을 따라가는 행위였던 때가 있듯 히라야마 역시 무의식적 목소리를 따라 청소부라는 직업을 선택했을 것이고, 나머지 일상의 영역들을 이후에 하나씩 하나씩 채워 넣어 완성했을 것이다.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중
불필요한 모든 것들을 쳐내고, 나의 성실을 기꺼이 투여할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것들만 남긴 단촐하고도 정갈한 히라야마의 일상이지만 앞서 말했듯 그건 어떤 잘 기획된 프로젝트의 결과물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이 얘기가 그의 일상이 우연뚝딱 만들어졌다는 뜻으로 향하진 않는다. 자신의 집을 손수 만드는 사람의 정성처럼 히라야마 역시 자기 삶을 하나씩 디자인하고 꾸준히 수정하여 지금 우리가 영화에서 바라보는 최종 형태로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그는 분명 시나리오에 존재하는 한 인물이기에 굳이 이렇게 영화 너머의 역사까지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왜였을까... 한편으론 그가 정말 현실적이면서도 호소력 있는 인간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히라야마라는 사람의 삶을 더 잘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히라야마가 담아내는 일상이 결국 우리의 삶까지 반추하게끔 만드는 흡입력이 있기에 본래 우리 자신을 향하던 관심까지 다시 그에게 투여되어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가 만든 일상은 실제로 하나의 집과 비슷했다. 시간대별로 잘 구획된 방이 있고, 높이 쌓아올리진 않았지만 내외부를 가르는 담벼락이 눈에 띄는 형태였다. 하늘로 난 창은 크고 투명했지만 사람들을 향한 소통의 창은 드물게 보이는 편이었고, 과거를 연상할 수 있는 가구들은 모두 치워버렸다. 다만 그 가운데 특별한 몇몇 것들이 남았다. 그 과거들은 모든 방의 한 구석에, 하지만 잘 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게 그의 일상은 신중하게 선별된 과거들로 채워진다.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중
과거에서 가져온 노래들
스크린 곳곳에서 멋진 올드 팝송이 흘러나온다. 히라야마의 지금 모습과 이전 경험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노랫말은 감독의 의도로 선택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노랫말을 몰라도 큰 상관은 없다. 그는 과거 자신의 인생 벽면을 특별한 색으로 칠해준노래들을 선별하여 카세트 테이프라는 옛 매체로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특별하게 남겨진 과거의 노래들은 차에 올라 운전이 시작되는 매일 아침 다시 한번 신중하게 선택되어 도쿄 시내를 물들이는 아침 햇살처럼 차안을 가득 채우는 사운드로 퍼진다. 어쩌면 그 옛 노래들은 자신의일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타이밍에 나를 감싸는 보호막이 되었을 수도 있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서도 다시 세상에서 떨어져 나오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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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 히라야마의 일상과 가장 가깝게 맞닿아있던 그의 동료는 안타깝게도 그의 인생과는 전혀 겹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유일하게 있다면 그 동료의 귀를 만지기 위해 가끔 찾아오던 친구를 소개받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친구는 장애가 있는 친구였다.) 청소라는 본업에서도 그렇지만 히라야마의 과거가 담긴 소중한 테이프도 그에겐 환전의 도구로만 비쳐질 뿐이다. 그랬던 그의 세상이 자신의 삶과 전혀 무관한 동료의 여자친구에게 새롭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는 것이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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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중
과거에서 가져온 책들
오래된 문고는 노동이라는 일상이 끝나고 잠들기 전까지 그의 유일한 동반자이다. 매일 들르는 목욕탕은 나의 알몸이 드러나는 공간이지만 반면에 나의 생각이나 감정은 좀처럼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공간이다. 역시 매일 저녁식사를 위해 찾아가는 식당의 사장이 건네는 인사도, 누군가에겐 자신의 인생만큼이나 중요한 스포츠의 승패도 히라야마의 삶 안쪽까지 발을 들이진 못한다. 그는 마치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차를 모는 운전자처럼 세상이라는 도로 속에서 주변 대상과 일정 거리 유지를 항상 실천하는 이였다.다만 책은 달랐다. 책이 펼쳐진 시간은 그의 마음도 조용히 펼쳐지는 시간이었다. 개인적인 추측이긴 하지만 아마도 그 책들은 그를 새로운 세상으로 인도하진 않았을 것이다. 주말에 한번 노포 분위기의 동네 서점에서 신중하게 골라온그 오래된 책들은 그의 저녁을 익숙했던 그 어딘가의 세상으로 잠시 데리고 갔을 수도 있고, 아니면 책과 동행하는 그 시간은 가지고 싶었으나 가지지 못했던 회한으로 칠해진 벽면을 한번 다시 그려보는 시간이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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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 그의 책 선택 순간을 매번 같이 확인했던 서점 주인은 자신의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히라야마의 선택에도 의미를 부여했지만 그건 안타깝게도 자신의 일기장 자물쇠 비밀번호의 유용성 범위를 과대 해석한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 당연하겠지만 히라야마의 일기장 비밀번호가 같을 순 없었다. 어떤 분야의 전문성을 지녔다고 해서 그 해석과 조언이 다른 누군가의 삶에 반드시 의미 있게 적용되리라는 보장으로 이어지지 않음은 우리내 인생의 재밌는 교차점이다. 교차하지만 연결되어 있지 않은 도로들이 종종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의 방에 남겨진 오래된 도서들이 갑자기 찾아온 어린 조카에겐 뜻하지 않게 새로운 세상과 이어지는 다리 역할을 해줬다는 것이 아니러니다. 이어질 거라 전혀 예상치 못한 도로가 간혹 이렇게 연결되는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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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중
과거에서 가져온 카메라
과거에서 가져온 것으로 현재를 채워주는 것은 노래와 책이었다. 그렇기에 어떤 면에서 그건 진짜 현재는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카메라는 조금 달랐다. 그건 과거에서 가져왔지만 현재를 기록하기 위함이었다. 하루 중 잠시 반짝이는 그 찰나의 시간을 담고자 과거의 필름 카메라가 필요했고, 그 카메라는 닮지 않은 듯하면서도 닮았던 조카와 히라야마를 이어주는 매개체이기도 했다.(영화적 장치로써 카메라에 부여된 역할이 조금 더 있는 것 같지만 지금은 카메라가 아닌 사진을 찍는 행위를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의미에 조금 더 집중하려 한다.)
일을 하던 중간에도 중요한 순간이 찾아오면 꺼내는 카메라였다. 잔잔하게 흔들리는 수면 위 일렁이는 햇살처럼 나뭇잎 사이사이로 떨어지는 햇살도 참 아름다웠다. 딱 그 순간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현재형 코모레비였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포착하고자 했던 반짝이는 현재들은 아쉽게도 결코 붙잡을 수 없는 현재일 뿐이었다. 찰나의 순간을 아름답게 감상하던 히라야마의 표정과 일주일에 한번 현상한 사진을 바라보는 히라아먀 사이엔 분명 간극이 있었다. 코모레비는 분명 아름답지만 현장에서 지켜볼 때 그의 입가에 번지던 환한 미소는 사진으로 되찾아온 과거의 순간에는 별로 반응하지 않았다.(조카가 떠난 뒤엔 심지어 정리하다 말고 치워버린다.) 현상된 필름엔 기뻤던 순간이 발자국처럼 찍혔겠지만 기쁨은 휘발되고 발자국만 남았기 때문이었을까. 그래서인지 결국 그 사진들은 날짜별 박스에 담겨 벽창고 가득 퇴적물처럼 쌓여만 가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사진찍기를 계속 해나가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좋았던 순간이 있었음을 확인하는 용도이자 증명하는 기록물이었을까... 그가 한 인터뷰에서 히라야마라는 인물의 설정과 연관해 '첫 코모레비'에 대한 강렬했던 의미를 감독으로부터 살짝 들었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코모레비에 대한 그의 반응 역시 현재보다는 과거에 대한 리부트이자 당시 감정의 반복 재생에 가까울 수도 있다.
퍼펙트 데이즈 포스터 중
물론 이 추측을 정답이라 단정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굳이 답을 하나로 정해야 할 필수적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는 사진을 찍는 이유가 아니라 그 행위를 통해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보다 본질적인 의미에 대한 부분이다. 늘 과거의 것들로 현재를 채우는 히라야마에게 있어 유일하게 남기고 싶은 현재가 바로 반짝이는 코모레비의 순간이었다. 그러했기에 애써 붙잡으려 시도했지만 그렇게 남겨본 시간들 역시 찰나의 순간을 지나면 바로 과거라는 회전문을 통과해버리고 만다는 사실. 가슴을 채우던 감흥도 시간이란 터널을 지나며 희석돼버리고, 눈앞을 화려하게 수놓던 색채가 빠져나가 흑백으로 남겨지는 것. 그게 바로 인생이라는 다큐멘터리였다. 지금 돌이켜보니 매일밤 꿈에 흑백의 코모레비가 배경처럼 일렁였던 것은 붙잡고 싶어도 붙잡을 수 없음이 드러나는 장면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는 우리내 삶이라고 다르지 않다. 부와 지위로도, 명예와 지혜로도 현재를 붙잡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물리적으로도빛은 붙잡지 못하는 존재이니 코모레비에 적용된 비유는 뜻하지 않게 아주 적절하다.
청소에 진심이었지만 청소라는 행위 자체가 그를 채워주는 것은 아니었다. 앞에서도 말했듯 청소는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어도 가능한 영역이었다. 물론 다른 심리적 의미를 부여할 수는 있다. 카세트 테이프 구멍에 연필을 꽂아 되감는 행위는 보통 늘어진 테이프를 원상태로 복구시키는 방법이다. 이를 과오에 대한 복구나 문제가 생기기 이전으로 회귀하길 바라는 기대로 바라볼 수 있듯 화장실 내 기물을 청소하는 행위는 청소라는 어휘에 담긴 의미처럼 더러워지기 전의 상태로 되돌리려는 행위로 해석할 여지는 있다. 다만 이런 부가적 해석의 맞고 틀림을 떠나 그의 삶을 실질적으로 채우고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결국 (일정 부분을 떼어내긴 했지만) 과거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했기에 그에게도 남길 수 있는 현재이자 다음으로 이어지는 현재가 필요했다. 그가 의식적으로 원하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커다란 줄기에서 잠시 비껴나 마치 타임슬립의 영역과도 같은 지금의 일상엔 고통과 번뇌를 벗어난 안온함이 존재했지만 다음으로 이어지지 않는 순간의 현재만이 잠깐씩 반짝일 뿐이었다.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중
그러했다. 그렇게 정성껏 가꾼 시간과 공간의 울타리 속에서 누리는 평온함이 있었다. 쉬어가는 주말의 일상은 낮잠과도 같았다. 그게 퍼펙트라면 퍼펙트였다. 이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가 설사 거기까지만 이었더라도 충분히 공감버튼을 눌렀을 것이다. 하지만 인생이란 게임의 문제가 피난처 하나 만들어 모두 풀어낼 수 있다면 다들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그의 평온함에 공감하면서도 마음 한켠 아슬아슬해 보였던 것은 그가 정한 테두리가 어느 순간 깨질 수도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다만 처음엔 히라야마라는 인물을 드러내는 몇몇 사건들이 그와 그의 일상을 보다 단단하게 지탱하는 기둥처럼 보였기에 평온한 일상 뒷면에 내재된 불안정성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긴 했다. 히라야마라는 인물은 볼수록 놀라웠다. 엄마를 잃어버리고 화장실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차분하게 달래줄 수 있었으며, 말은 하지 않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그를 향한 경멸과 두려움을 드러내는 아이 엄마의 시선도 별다른 상처 없이 넘길 수 있었다. 누군가가 쓰레기처럼 남긴 작은 쪽지가 날 알아달라는 신호일 수도 있음을 감지하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길거리 노숙인에게 유일하게 진정성 있는 눈길을 건네주는 사람이었다.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기준선까지만 진행해도 전혀 욕먹을 일 없는 청소라는 역할을 구도자의 수행처럼 정성을 다해 진행하고, 반면에 선을 넘는 듯한 동료의 돌발적인 행동과 괴씸한 요청이 난무하는 상황에서도 그래도 받아줄 수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 가늠해보는 품성과 인격은 누구나 쉽게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히라야마라는 사람은 그저 연약하거나 상처를 입고 도망치는 존재가 아닌 보다 큰 사람이었고 생각보다 훨씬 단단한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따뜻함을 간직하고 있고 남과 자신을 모두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평소 우리를 가장 불안하고 힘들게 만드는 요소 중의 하나는 '남들의 시선'인데 최소한 히라야마는 자기 힘으로 이 부분을 넘어선 것 같았다. 그런 그였기에 불안함이 덜 느껴졌던 것이었다.
하지만 인생이란 개인의 품성이나 인격으로 모든 것이 좌우되지 않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오히려 선한 사람이 악인의 덫에 더 잘 걸리기도 한다는 점이 인생의 아니러니다. 성실한 농부가 일 년 내내 정성껏 가꾸었던 작물이 한순간 몰려온 태풍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장면도, 자신과 전혀 무관한 끔찍한 전쟁의 파도에 어린 아이들조차 휩쓸려야만 하는 장면조차 여과없이 보여주는 냉혹한 스크린이 바로 인생극장임을 다들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바 있을 것이다.
퍼펙트 데이즈 포스터 중(편집)
그러했다. 히라야마의 평온했던 일상에도 조금씩 균열이 생겼나기 시작했다. 때론 들쭉날쭉한 동료 타카시의 행태로 인해, 또는 어느날 갑작스럽게 불쑥 찾아온 잊고 지냈던 조카 니코에 의해. 그렇게 갈라진 일상의 틈으로 잔잔했던 평온함도 조금씩 새어나가기 시작했다. 어떤 면에서 그 일상이 깨지지 않았으면 하는 기대는 히라야마보다 그걸 바라보는 우리의 맘속에 더 크게 피어오르지 않았을까 싶기도. 잘은 모르겠지만 많은 이들이 히라야마 대신 미움과 꿀밤의 화살을 히라야마의 동료에게 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괜찮았을까? 아니다. 사고의 이유는 핵심이 아니다. 깨어진 이유가 핵심이 아니라 깨어질 수밖에 없는 일상의 연약한 본질이 드러났다는 점이 중요하다.
깨어짐은 필연적으로 괴로움과 불쾌함을 불러온다. 때때로 허무함과 자괴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누군들 그걸 좋아할 리 없다. 조카로 인해 좁은 구석에서 잠을 자는 거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치자. 하지만 결국 조카로 인해 필연적으로 해야 할 추가적인 고민이 많아졌다. 일상은 흐트러지고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그의 일상에서 그 부분이 핵심이었는데... 누군가와 대화를 해야 하는 것도, 누군가를 챙겨주는 것도 때에 따라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기도 한데 이제 쓰지 않던 에너지를 써야만 했다.
하지만 우리가 영화에서 확인했듯 조카와의 진솔한 대화가, 혼자만의 일상이 아니라 함께하는 일상이 가져다 주는 의미는 히라야마 본인도 무의식적으로 갈구했던 그 무엇이자, 열심히 가꾸었던 자신만의 퍼펙트한 세계에선 절대 채울 수 없었던 그 무엇이었다. 자신이 청소한 화장실을 이용하면서도 막상 그 화장실을 청소한 자신을 하대하는 눈빛과 무던히도 마주쳐야 했을 텐데 그들의 무시는 참고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때론 인정이 필요했다. 동료에게조차 인정보다 핀잔 아닌 핀잔을 들어야 했었던 그였으니까. "그럼 나도 삼촌이랑 같이 화장실을 청소할게." 담담한듯 소박하게 길어낸 조카의 솔직한 고백이었지만 막상 히라야마에겐 가슴속 메말랐던 지역을 촉촉하게 적셔줬을 것이다. 매일 편의점 샌드위치로 점심을 해결하는 작은 벤치의 절반을 조카에게 내어주었지만 나뭇잎 사이 반짝이는 햇살을 같이 올려다보며 즐거워하니 허기를 채우던 점심시간은 예상치 못한 행복까지 채워서 돌아왔다.
기뻐하는 것도 좋지만 기뻐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도 좋은 일임을 다시금 느낀다. 균열의 틈새는 담고 있던 것이 빠져나가는 길도 되지만 새로운 무엇인가가 들어오는 길도 된다는 점이 아니러니다.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중
지금은 과거로부터 왔고 다음은 지금으로부터 이어진다
두 사람의 자전거 장면이 있다. 서로 살아온 경험도 다르고 경로도 다른 두 사람의 인생에 대한 생각이 서로 만나는 시간이기도 했다. 히라야마의 과거와 현재가 엿보이는 시간이기도 했다. 세상엔 연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연결되어 있지 않은 많은 세상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히라야마. 그건 과거를 의미하기도 하고 현재를 의미하기도 하며, 이 사회의 본질을 의미하기도 하고 히라야마 개인의 역사를 의미하기도 하는 말이었다. 일단 우리가 바라보는 범위로 돌아가서 보면 히라야마가 선택한 지금의 세상은 의도적으로 연결을 단절시킨 세상이었다. 어렵게 새로 구축한 세상이었지만 니코가 찾아오며 그 세상에 균열이 생겼다. 일상의 외형만이 아니라 그 세상을 지탱하던 히라야마 내면에도 작은 흔들림이 나타난다. 이야기가 이어지며 조카의 질문에 히라야마가 대답한다. 저 물은 흘러 바다에서 만날 거라고. 히라야마도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만나는 것이 인생이라고. 만나야만 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의도치 않았던 조카의 가장 큰 역할은 히라야마가 애써 멀어지려 했던 과거와 다시금 만나게 했다는 점이다. 니코하고의 관계와는 별개로 가출이란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이 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딸을 데리러 온 여동생은 얼핏 보아도 지금의 히라야마와 삶의 궤적이 꽤나 다름을 알 수 있었다. 그 속사정까지 그려지진 않았지만 예상하지도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던 여동생과의 만남은 일부러 자신의 일상에서 끊어냈던 과거를 마주해야만 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그는 조카를 보내며 결국 동생을 안아주었다. 그 안아줌의 스토리적 의미를 정확하게 추정하긴 어렵겠으나 끊어냈던 과거와 일정 부분 화해하고, 용서하고, 이해를 구하는 장면임을 느끼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꾸욱 눌러놨던 감정의 보따리가 열리며 쏟아지는 히라야마의 눈물은 우리 모두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확신할 수 있었다. 이 만남이 히라야마에게 꼭 필요했던 만남이었을 것이라고.
퍼펙트 데이즈 스틸컷 중
마지막 균열, 퍼펙트하지 않은 자신을 탓하다
이 균열이 특별했던 점은 그 이유가 외부가 아닌 히라야마 자신에게 기인하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찾아가는 중년의 여사장이 운영하는 술집이 있었다. 히라야마가 그곳을 찾는 이유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그곳에 머무는 시간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딱 한 걸음만 더 나아가면 플러팅으로 간주할 만한 모호한 상황도 있었다. 물론 히라야마는 즐거움과는 별개로 그 술집에서도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느 주말 찾아온 여사장의 옛 남편(히라야마가 아직 그 대상자가 누구인지를 알기 전)과 여사장이 포옹하는 장면을 보자 놀라 갑자기 달아나기 시작하는 히라야마였다. 동생 앞에서 흘린 눈물이 의도해서 흘린 눈물이 아니듯 이 행동 역시 의도해서 나온 행동이 아님은 분명했다. 다만 맥락은 충분히 유추 가능하다. 당황스러움이 폭발하고 감정의 파도가 갑자기 몰아치지 않았으면 나오지 않았을 행동이었으니까. 거리를 둔다고 두었던 곳이었다. 어쩌면 안전거리 밖에 있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던 거였다. 히라야마 본인이 인지하고 있었는지와는 별개로 히라야마의 내면은 이미 일정 부분 그 여사장과 겹쳐 있었기에 나타날 수 있었던 행동이었다.
그 이후 맥주를 사들고 강변으로 도망치듯 달아난 히라야마를 기어코 좇아와 이야기를 나누는 여사장 전남편과의 일화도 재미있지만 나에게 더 의미 있게 다가왔었던 것은 그렇게 퍼펙트하게 자신의 일상을 관리하던 히라야마였지만 그 일상의 깨어짐에 기여한 주요한 이유 하나가 관리하지 못한 자신의 마음이었다는 사실이다. 허나 어떤 면에서 그건 너무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 그러하니까.
좋아했던 것으로 세상을 채우면 세상은 아름다울까..? 아이러니하지만 그렇지 않음이 인생이다. 이는 마치 내가 좋아하는 색 하나로 온 세상을 칠하는 것과 같다. 히라야마의 마지막 표정은 그래서 더 인상적이다. 많은 것들이 깨어졌지만 그래서 실패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길이 열렸다. 다만 그 길은 예전처럼 평온하기만 한 길이 절대 아니다. 강물이 그렇듯 부딪히며 나아가게 된다. 고통의 바닥을 맨발로 걸어야 하는 나를 안아주어야 할 때도 생길 것이고, 너로 인해 잔잔한 기쁨이 채워지는 순간도 만날 것이다. 현재를 남기고 싶으면 현재를 살아가야만 한다. 인생이 교차하는 그 지점에 나도 진심으로 발을 들여야 한다. 그 현재는 카메라가 아닌 나 자신의 삶으로만 담아낼 수 있다. 인생이란 그럴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완벽하지 않은 그 수많은 날들이 모여 결국은 'Perfect Days'가 될 것이다.
퍼펙트 데이즈 포스터 중
마지막으로 짧게 영화에 대한 감상평 몇 줄 적어본다. 고맙다는 의미이다.
+ 짧은 일상을 연주하였지만 그 교향곡엔 긴 인생 한 편이 담겨 있었다.
+ 재미없어서 정말 재미있었던 영화였다.
+ 복잡하지 않음을 추구하는 영화인데 생각이 많아지게 하는 영화였다.
+ 떨어지는 햇살은 살아 있는 나무의 숨쉬는 나뭇잎들을 만날 때 아름다운 코모레비가 되었다.
+ 물은 흘러야 하고 인생은 만나야 한다.
+ 인생의 복잡성은 일상의 단순성과 만나 아름다운 이중주로 탄생했다.
+ 히라야마는 분명 스크린 밖에서도 살아있는 존재가 되었다. 나는 그를 진심으로 만나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