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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늘나 Oct 16. 2024

'또랑'의 물고기들

'음미하다 6

 우리 동네에서 조금 먼 곳에는 바다가, 조금 가까운 곳에는 강이, 집 바로 뒤에는 도랑이 있었다. 논과 밭만큼이나 물가도 많았던 이유 때문인지 우리 식탁에는 고기보다는 생선이 훨씬 많았다. 사실 고기는 거의 구경할 수 없었다. 


 자장면보다는 ‘짜장면’이 주꾸미보다는 '쭈꾸미'가 맛있는 것처럼, 도랑보다는 ‘또랑’과 ‘똘’이 더 맛깔스럽다. 우리는 도랑을 ‘또랑’ 또는 ‘똘’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마음이 동하면 ‘또랑’에서 물고기를 잡아 오셨다. ‘또랑’에서는 일 년 열두 달 내내 붕어, 피라미, 송사리 등을 잡을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커다란 대나무 장대에 누런 그물을 대충 얽어서 만든 어망을 어깨에 걸치고 까만 장화를 신고 나타나시면, 그날 저녁은 백발백중 매운탕이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저녁 딱 한 끼 먹을 만큼의 물고기만 잡으셨다. 잡아 온 물고기들을 손질하는 것은 온전히 아버지의 몫이었다. 빨간색 고무통에 풀어놓은 물고기들은 대부분 살아있었지만, 성질 급한 것들은 죽어 있기도 했다. 송사리처럼 작은 물고기를 제외한, 나머지 물고기들은 비늘을 벗겨야 했다. 칼등으로 ‘촥촥촥’ 밀어낸 비늘이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기도 했다. 


 물고기 손질의 최대 고비는 내장 손질이었다. 작은 물고기는 내장째 먹어도 상관없었지만, 큰 물고기들은 내장을 제거해야만 했다. 지금의 내 나이보다 훨씬 더 젊다 못해 어렸던, 그 시절의 아버지는 손에 물고기 피범벅이 되는 것을 개의치 않고 열심히 손질하셨다. 언젠가 나도 아버지 나이가 되면 그렇게 살아있는 물고기를 손질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니었다. 깨끗하게 손질되어 판매대에 가지런히 진열된 생선조차 징그럽다고 호들갑을 떤다. 그때처럼 여전히 먹기만 한다. 바로 전까지 살아서 팔딱였던 물고기의 배에서 시뻘건 피와 내장이 흘러나오는 모습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두 손으로 눈을 가린 채, 그러나 실눈을 뜨고 자세히 봤다. 살아있는 물고기를 죽이는 장면은 너무도 무섭고 징그러웠다. 나도 어른이 되면 아버지처럼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걱정되고 두려웠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지만 모두가 그 일을 피한다면 그 많은 고기며, 생선을 어떻게 먹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의 먹기만 하겠다면 돼지는 돼지고기가 되지 못하고, 소는 소고기가 되지 못한다. 돼지나 소를 잡는다는 이유로 백정을 인간 취급도 하지 않으면서, 정작 그들이 잡은 고기를 탐욕스럽게 먹었던 양반들의 이중성이 행여 나에게 묻을까 경계한다. 내가 먹는 모든 것에 손을 보탠 자연과 사람들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으로 경계심을 유지하고 있다. 


 아버지의 물고기 손질이 끝나면, 어머니께서 바통을 이어받으셨다. 사시사철 채소가 넘쳐나는 텃밭에서 고구마 순과 조선호박을 따는 것으로, 어머니의 매운탕 끓이기가 시작되었다. 우리 집 매운탕에 꼭 들어가던 조선호박은 요즘 마트에서 보는 길쭉하고 매끈한 애호박과는 많이 달랐다. 마치 내 얼굴처럼 동글 넓적한 호박은 달큼함이 차고도 넘쳤다. 호박이 작을 때는 씨앗까지도 함께 넣고 끓였다. 씨앗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호박 과육은 오랜 시간 끓이면 축축 늘어지면서 고구마 순과 작은 물고기들과 얽히고설켜서 진국이 되었다. 


 매운탕을 끓일 때면 커다랗고 까만 가마솥이 특히나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커다란 무쇠솥에 푹푹 끓여진 매운탕은 요리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비법이었다. 밥이 다 되어갈 때쯤이면, 아버지께서는 짚을 엮어 직접 만든 커다란 멍석을 마당에 깔고, 그 멍석 위에 동그란 밥상을 펴셨다. 


 아버지가 갓 잡아서 손질한 싱싱한 물고기와 텃밭에서 건강하게 자란 채소, 음식 솜씨 좋기로 근방에서 소문이 자자했던 어머니의 실력에 무쇠 가마솥까지 매운탕은 이미 맛있었다. 이 세상 최고의 요리사가 온다고 해도 절대 흉내조차 낼 수 없을 맛이었다. 매운탕을 끓인 날에는 갓 지은 따끈한 밥만 있으면 되었다. 노을이 지는 풍경까지 더해져 더 이상의 구색 맞추기용 반찬은 필요 없었다. 


 고춧가루 듬뿍 풀어진 새빨간 국물 위에 초록색과 하얀색의 대파가 가득 올려져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끈한 매운탕은, 숨 막히는 삼복더위에 제격이었다. 매운탕을 끓이는 날이면 우리 삼 남매는 무조건 매운탕에 밥을 말아먹었다. 상상이 되는가? 8살, 6살, 5살 아이들이 그 매운 매운탕에 밥을 말아먹고, 직접 생선 살을 발라 먹는 장면이! 


 버려지는 살들이 많았지만, 부모님들은 생선 살 바르는 걸 도와주지 않으셨다. 매콤함에 얼굴이 벌게졌지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물을 마시면 됐다. 


 아이들만을 위해서 맵지 않은 반찬을 따로 만드는 일은 없었다. 유기농과 한우로 정성껏 만든 반찬은 아이에게 주고, 유통기한 지나면 아빠가 먹는 요즘과는 달랐다. 적어도 밥상 위에서는 모두가 공평했다. 물론 부모님이 먼저 드시고 나서, 우리가 먹는 순서는 있었지만, 우리는 모두 공평했다. 


 혼자서만 유기농과 한우 먹고 자란 아이는, 혼자서만 유기농과 한우를 먹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자랄 뿐이다. 적어도 밥상에서 만큼은 모두가 공평해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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