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3부 말라카의 눈물(4)
말레이 반도 중남부의 말라카는 14세기 수마트라 섬에서 온 파라메스바라가 이슬람 왕국을 세운 후, 실크 로드의 거점 도시로 성장하였다. 1511년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정복하여 아시아 최초의 유럽 식민지로 삼고 향신료 무역을 독점했으며 기독교 전파를 위한 기지로 만들었다.
이 무렵 명나라의 정화가 이끄는 함대도 말라카를 방문하였는데, 이때부터 중국인들이 말라카로 이주해 살기 시작했으며 그 뒤에도 주석 광산의 노동자로 많은 이주민들이 중국에서 들어와 화교사회를 만들어 갔다. 또한 현지인과 결혼하여 중국과 말레이 문화가 섞인 페라나칸 문화를 만들었다.
말라카, 중세 향신료 무역의 요충지였던 이곳은 오늘날에도 오랜 세월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세는 다시 쿠알라룸푸르로 돌아와 TBS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말라카에 도착했다.
"드디어 왔네... 말라카." 이세는 가방을 어깨에 멘 채 중얼거렸다.
그는 일단 하텐호텔에 짐을 풀고, 외조부가 남긴 주소를 들고 바바뇨냐 박물관으로 향했다.
아름다움을 찾는 것은 인생의 진리라고 하였다. 먼 길을 돌아 이곳까지 온 것은 그 아름다움의 순간을 만나기 위해서다. 존커 거리는 차이나타운의 중심으로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중국풍 숍들이 밀집되어 있다. 존커 거리의 원래 이름은 ‘잘란 항제밧(Jalan Hang Jebat : 항제밧거리)’이다. 서쪽에는 바바뇨냐 박물관이 있는 툰 탄 청록길이고 동쪽에는 ‘쳉훈텡’사원과 힌두사원이 있는 ‘투캉 에마스’길이 있다. 이세는 말라카 강을 끼고 ‘툰 탄 청록’ 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20여 분을 걸어가니 평범한 주택을 개조한 바바뇨냐 박물관이 보인다.
도착한 박물관은 의외로 소박한 모습이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한 아가씨가 환한 미소로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이세는 잠시 멈칫했다가 말을 건넸다. "혹시 찬 꾸어 관장님 계신가요?"
"아버지는 지금 외출 중이세요. 곧 오실 텐데, 기다리는 동안 제가 박물관 안내해드릴까요?"
이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저는 이세라고 해요."
"저는 루잉이에요. 잘 부탁드려요."
그녀는 이세를 이층으로 안내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이곳은 말라카 부호였던 찬쳉슈가 살던 저택이에요. 페라나칸, 즉 중국계 말레이 후손들이 살았던 집이죠. 바바는 남자, 뇨냐는 여자를 말해요."
이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시된 유물들을 바라보았다.
루잉은 어느 사진 앞에서 멈췄다. 전족을 신은 뇨냐 여인이 가득한 금붙이를 두르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도망가지 못하게 전족을 신겼다고 해요. 결혼 후에는 빈랑 열매를 씹게 해서 늘 몽롱하게 만들고, 남편 바바들은 그런 뇨냐를 사치품처럼 취급했죠."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희 할머니도 그런 삶을 사셨다고 해요."
이세는 조심스레 물었다. "루잉 씨도 뇨냐이신가요?"
"아뇨. 저희 어머니는 일본 분이셨어요. 여행 중에 아버지를 만나 사랑에 빠지셨죠. 하지만 날 낳고 곧 일본으로 돌아가셨어요. 아버지는 평생 다시 결혼하지 않으셨어요."
이세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그는 말했다. "저는 향을 만드는 조향사예요. 전설 속 향을 찾으러 왔어요."
루잉의 눈이 커졌다. "정말요? 얼마 전 여기 말라카에 향기 바가 생겼어요. 아직 못 가봤는데, 다녀온 사람들은 다들 빠져든대요. 같이 가보실래요?"
이세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때, 박물관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섰다. 루잉이 다가가 말했다. "아버지!"
그는 찬 꾸어였다. 이세는 정중히 인사하며 자신의 방문 목적을 설명했다. 찬 꾸어는 조용히 이야기를 듣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향설해를 찾고 있군요. 중국 등위산 이야기, 들어보셨나요?"
"조금요. 향설해가 거기서 유래됐다고 들었어요."
찬 꾸어는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중국에 있는 등위산(燈尉山)은 다른 이름으로 원묘(元墓)라고도 하는데, 서쪽으로는 태호를 등지고, 동쪽으로는 '비단봉우리(錦峰)'를 마주 바라보고 있다. 그 붉은 절벽과 비취색의 전각은 그림같이 아름답다. 이 고장사람들은 매화 재배를 생업으로 삼고 있어, 꽃이 필 때면 수십 킬로미터의 일대가 눈이 쌓인 것 같더고 하여 이곳을 '향기로운 눈의 바다(香雪海)' 라고 한다고 했다.
"그곳엔 네 그루의 기묘한 측백나무가 있어요. '맑은 나무', '진기한 나무', '예스런 나무', '괴팍한 나무'. 모두 한나라 이전의 고목이죠. 이 나무들을 빻아 섞은 것이 향설해입니다."
이세는 숨을 죽였다. 찬 꾸어는 말을 이었다.
"15세기 초, 정화 장군이 이 향을 말라카로 가지고 와 후손에게 물려주었다는 전설이 있어요. 어쩌면 그 후손이 이 근처에 있을지도 몰라요. 희망을 잃지 마세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요즘 이 지역에서 여성 실종 사건이 잦아요. 이상한 향기가 밤마다 퍼지기도 하고요. 뭔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합니다."
이세는 직감했다. 향기와 실종. 뭔가 연결돼 있다는 것을.
"그 향기 바, 꼭 가보고 싶어요."
찬 꾸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잉과 함께 가보세요. 저는 바바 대표들과 향설해에 대한 회의를 열겠습니다."
이세와 루잉은 박물관을 나와 향기 바 ‘살루드’로 향했다. 밤의 말라카, 바람은 이상하게 달콤한 향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