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3부 말라카의 눈물(3)
이세와 알리아스는 보티 한 잔과 신선한 망고스틴으로 아침을 간단히 때우고 길을 서둘렀다. 이세는 아직 간밤에 일어난 일을 전혀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한참을 걷다 햇빛의 강도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 알리아스는 숨을 죽이며 두리안 나무 곁으로 다가갔다.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두리안이 익어 저절로 땅에 떨어졌다.
알리아스는 활짝 웃으며 두리안이 떨어지는 것을 좋은 징조라 했다. 그리고 익숙한 손길로 긴 칼을 꺼내 두리안 껍질에 칼집을 내자 쩍 하고 벌어졌다. 노란 두리안 과육이 방마다 가득했다. 한 입 베어 물자 진한 향기가 온몸을 감싸왔다. 지금껏 맛본 어떤 두리안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무상킹’이라는 최고급 두리안은 아니지만, 하품종인 ‘깜봉’조차도 이 맛은 독보적이었다.
갑자기 알리아스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서둘러 밀림을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곧 큰 비가 내릴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천둥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금세라도 쏟아질 듯 하늘이 어두워졌다.
밀림에 큰비가 내리면 길을 잃기 쉽고, 땅이 질퍽거려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다고 했다. 은백차를 구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죽을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폭우가 쏟아졌다. 비는 어둠을 몰고와 숲 전체를 빨아들이듯 쏟아졌고, 나무와 풀, 꽃과 날짐승들 모두 잠든 듯 움직이지 않았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진흙탕이 된 길은 한 발자국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세는 몸에 열이 있다는 걸 직감하고 알리아스에게 도움을 청했다.
알리아스가 몸을 만져본 뒤, 이세가 밀림의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 같다고 말했다. 약도 없고, 이곳을 벗어날 수도 없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몸은 점점 불덩이처럼 뜨거워졌고, 쓰러질 듯한 몸을 일으켜 걸어 보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세는 할아버지가 준 구세향(救世香)을 맡아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카메로니안 골드 보티를 씹어도 아무 변화가 없었다. 이제 자신의 생명조차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코의 감각은 이미 오래전에 무뎌져 아무 냄새도 느끼지 못했다.
알리아스는 이세를 큰 나무에 눕히고 자신의 몸으로 체온을 데우기 시작했다. 비는 멈출 줄 모르고, 밀림 나무 사이로 강물 같은 빗줄기가 거칠게 흘러내렸다. 물은 점차 차올라 그들이 누워있는 나무 등성이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이세는 점점 의식을 잃어갔다. 알리아스는 “살려 달라”고 절박하게 외치며 이세를 꼭 껴안았다. 의식은 희미해지고, 죽음의 문턱이 점점 가까워졌다. 알리아스의 입김과 체온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비가 멈췄다. 언제 그랬냐는 듯 눈부신 햇살이 나무 사이로 스며들었다. 알리아스는 조용히 두리안 나무 뒤편으로 걸어갔다.
그 순간, 은빛을 내뿜는 차나무와 마주했다. 너무 찬란해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살며시 고개를 들어 차나무 잎에서 뿜어 나오는 향기를 들이켰다.
길게 늘어진 잎사귀에서 쏟아지는 초록빛 빗물이 모자 위로 굴러 떨어졌다.
어려운 길을 지나 마침내 만난 은백차 나무는 말없이 자신이 견뎌온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었다. 태고의 원시로부터 이어져온 차나무는 영원을 전하지만, 이세에게는 오히려 ‘순간’을 마주하는 시간이었다.
아열대의 뜨거운 빛이 대지를 내리쬐자, 차나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향기가 되어 숲 속에 숨어 있던 모든 냄새를 가두고 진한 원시의 향기를 퍼뜨리며 하늘로 올라갔다.
그리고 알리아스에게 자신이 지켜온 긴 외로움과 행복에 대해 속삭였다. 은백차 나무는 아무에게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밀림을 사랑하고 아끼는 이들에게만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알리아스는 조심스레 차 잎을 따기 시작했다. 꼭 필요한 만큼만 따서 주머니에 넣고는 서둘러 이세에게 다가갔다. 그는 전통의식을 따라 자신의 가슴을 칼로 그어 나온 피에 은백차 잎을 섞어 이세에게 먹였다.
이세는 천상의 향기가 아련히 들려오는 가운데 눈을 떴다. 은백차의 소리와 향기였다.
라임, 오렌지 블로섬, 피치, 바질, 레몬, 베르가못, 네롤리 등 뜨거운 열대 과일과 푸른 잎들이 상쾌하고 초록빛 가득한 바람의 노래를 불렀다.
바이올렛, 프리지아, 자스민, 히아신스, 릴리 오브 더 밸리, 로즈, 갈바눔, 마리골드와 스파이스가 어우러져 여인의 우아함과 달콤함을 노래했고, 아이리스, 샌들우드, 앰버, 머스크, 오크모스, 세이지, 베티버, 세더우드, 스타이락스(때죽나무)가 태고의 깊고 신비로운 밀림의 내음을 코끝에 맴돌게 했다.
알리아스는 이세가 깨어나자 눈물을 흘리며 오랫동안 그를 꼭 껴안았다.
두 사람은 은백차 나무가 간직한 영원한 향기를 가슴에 묻고,
밀림의 아쉬움을 뒤로한 채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