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3부 말라카의 눈물(2)
'오랑 아슬리(Orang Asli)'는 말레이시아어로 ‘최초의 인간(Original Men)’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약 63,000년에서 42,000년 전 동아프리카에서 말레이시아로 넘어온 이주민의 후예로,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초기 인류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5만 년 전 인도와 동남아시아, 호주로 진출했으며, 5천 년 후에는 이란을 지나 레반트(지중해 연안 지역)에 이르렀다. 인류가 유럽에 정착한 것은 4만 년 전 이후의 일이다. 초기 인류의 후손들이 역으로 코스를 밟아 인도와 이란을 거쳐 중동과 유럽으로 이주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역사의 한 페이지다.
이세는 뱀 문양을 한 사람들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품으며 TBS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그곳에서 카메론하일랜드행 버스를 타고 4시간쯤 달려 카메론하일랜드 하부에서 내렸다. 그곳에 사는 푸우 목사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다.
푸우 목사 내외는 이세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설탕이 듬뿍 담긴 홍차를 내어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카메론하일랜드의 최고급 차에요. 피로가 풀릴실거에요'
이세는 그간의 사정을 이야기하며 은백차를 서둘러 찾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지만, 푸우 목사는 고개를 저으며 말하였다. '은백차는 신이 정해준 사람만이 찾을 수 있어요'
銀白茶(은백차)는 깊은 원시 밀림 속 차나무에서 100년에 한 번 피는 윗부분의 싹으로만 만든다. 백차 중에서도 가장 희귀하고 비싸며, 특별한 가공 없이 약간만 발효시켜 건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오래 보관해도 향과 맛의 변화가 적고, 밝은 은빛을 띠는 것이 은백차만의 매력이다.
푸우 목사는 자신도 밀림으로 은백차를 구하러 갔다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큰 위기를 겪었음을 털어놓았다. 자칫 잘못했으면 발을 절단했을지도 모른다며 깊게 패인 상처를 보여주었다. 발과 다리가 움푹 파여 살이 깊게 잘려나간 모습이었다. 밀림은 원시 그대로의 땅이라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꼭 가야 한다면 밀림을 잘 아는 오랑아슬리 청년을 소개해 주겠다고 하였다. 그 청년은 깜봉24에 사는 청년이라고 했다.
깜봉은 마을을 뜻하며, 24는 산 아래 카메론하일랜드가 시작되는 타파에서 24km 떨어진 위치를 뜻한다. 오랑아슬리 마을은 보통 10~20가구 내외로 형성되어 카메론하일랜드 길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다. 깜봉25, 깜봉20 등 숫자로 마을 이름을 구분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들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열악했다. 수도와 전기는 물론 먹고 사는 문제조차 밀림에서 채취한 열대과일 판매에 의존한다. 그래도 이들은 도시에 나가거나 문명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편에 속한다. 하지만 밀림 곳곳에 흩어져 사는 오랑아슬리들은 여전히 원시적인 모습 그대로였다.
그들의 피부는 아프리카인의 그것처럼 거칠고 검었다. 그 땅에 이방인으로 남아 있는 아이러니를 보는 듯했다.
푸우 목사는 이세를 깜봉24로 데려가 오랑아슬리 청년을 소개했다. 그의 이름은 알리아스였다. 말쑥한 차림에 핸드폰까지 가진 그는 밀림에서 채취한 망고스틴과 두리안을 팔고 있었다. 그가 이세에게 망고스틴 한 꾸러미를 선물로 주자, 이세는 망고스틴 값으로 10링깃을 꺼내었다. 갑자기 푸우 목사가 “돈을 주지 마세요. 그건 예의가 아니에요. 성의를 거절하면 이곳에선 친구로 생각하지 않아요' 라며 그냥 받으라고 했다.
돈을 내는 것은 상대를 무시하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세는 그 말을 듣고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모든것을 돈으로 해결하려는 물질만능주의의 세계에서 보는 행복과는 사뭇 다른, 그들만의 행복한 삶이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청년 알리아스는 푸우 목사의 말을 듣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긴 칼과 천 주머니 두 개, 배낭을 챙긴 뒤 나왔다. 그는 이세에게 천 주머니 하나를 던지며 발에 차라고 했다. 궁금한 이세가 묻자, 그것은 카메로니안 골드 보티(Cameronian Gold Boh Tea)를 넣은 주머니라 했다. 이 차의 향이 밀림의 바이러스와 벌레들을 막아준다는 것이었다.
수만 년의 태고적 고독이 숨 쉬는 카메론하일랜드 밀림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내리쬐는 햇빛의 내음과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무수한 은구슬처럼 그들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태고의 맑음과 깊은 우주의 신비가 깃든 자연의 땅을 말이다.
알리아스는 이세가 걱정되는지 자꾸 뒤돌아보며 걸었다. 그는 아주 오래전, 밀림의 큰 두리안나무 옆에서 은빛 잎사귀를 내비친 차나무를 본 적 있다고 했다. 그곳으로 가려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어 야영 준비도 해왔다고 했다. 이 밀림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서둘러 걷지만 이세는 점점 지쳐갔다. 길을 내며 가니 온몸에 풀 베인 상처와 벌레에 물린 자국이 늘어났다.
어느덧 저녁이 찾아왔다. 태양은 서서히 기울어 키 큰 나무 잎사귀에 반짝이며 투영되었다. 길게 뻗은 석양의 잔상은 좁은 하늘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마지막 생명의 불꽃을 낯선 이방인에게 선물했다. 너무나 황홀한 광경에 이세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밤이 찾아왔다. 알리아스는 평평한 곳을 찾아 야영을 준비했다. 불을 피우고 작은 텐트를 치고 잠자리를 만들었다. 간단한 과일과 빵, 그리고 따뜻한 차 한 잔으로 저녁을 대신했다.
하늘은 너무나 맑아 별빛이 유성처럼 쏟아졌다.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이 소름끼치도록 무서웠다.
알리아스는 긴 칼을 들고 들짐승이 나타날까 불 가까이에서 이세를 지켰다. 시간이 흐르며 무서움은 오히려 편안함과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태고의 정적에 익숙하지 않은 이세에겐 새로운 경험이자 시간을 거스러는 여행과도 같았다. 그리고 그 고요 속에서 잠들었다. 영혼에 속삭이는 숲의 냄새를 맡으며, 내일 찾아야 할 차나무를 그리면서.
이세가 깊이 잠든 순간, 숲 속에서는 타다 만 나무 냄새가 스며들었다. 알리아스는 감고 있던 눈을 조심스레 열었다. 사람의 그림자가 비치고 쉿쉿 소리와 함께 뱀 세 마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뱀의 모습이었다.
그중 한 마리는 이미 이세의 텐트 안으로 들어갔고, 나머지 두 마리는 알리아스가 있는 불 쪽으로 향했다. 알리아스는 기합을 넣으며 칼을 휘둘렀고, 뱀 두 마리를 단숨에 베어버렸다. 급히 이세의 텐트로 달려간 알리아스는 이세 옆에서 죽은 뱀을 발견했다. 그 뱀은 이세 발에 있던 카메로니안 골드 보티 주머니를 문 것이었다.
밀림에 아침이 밝았다. 열대과일나무 너머로 구름을 머리에 이고 있는 거대한 산이 눈에 들어왔다. 빛나는 태양은 숲의 짐승들을 어머니의 품처럼 감싸 안았다. 숲 깊숙이에서 피어오르는 흙냄새가 온 사방으로 흩어졌다.
맑고 푸른 잎 위에는 나비가 나부꼈고, 멀리 보이는 나무뿌리에는 온갖 벌레들이 저마다 모습을 드러냈다.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유희 속에 피어난 꽃들은 저마다 고유한 향기를 뽐내며, 독특한 공간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