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말라카의 눈물
말레이 반도 중남부의 말라카(Malacca)는 오랫동안 한적한 어촌이었으나, 14세기 인근 수마트라 섬에서 온 파라메스바라가 이슬람 왕국을 세운 후,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잇는 지리적 이점 덕분에 해상 실크 로드의 거점 도시로 성장하였다. 1511년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정복하여 아시아 최초의 유럽 식민지로 삼고 향신료 무역을 독점했으며 기독교 전파를 위한 기지로 만들었다. 이 무렵 명나라의 정화가 이끄는 함대도 말라카를 방문하였는데, 이때부터 중국인들이 말라카로 이주해 살기 시작했으며 현지인과 결혼하여 중국과 말레이 문화가 섞인 페라나칸 문화를 만들었다. 이후 1641년에는 네덜란드, 1824년에는 영국이 차례로 말라카를 정복해 식민지로 삼았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말라카에는 서양 식민지풍 건물과 중국풍의 건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어 2008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바바 뇨냐(Baba Nyonya)란 남성인 바바와 여성인 뇨냐에서 온 말로, 중국인 남자와 말레이 여자가 결혼해서 서로 융합하면서 생성된 독특한 페라나칸 문화를 말한다.
15세기 명나라에서 많은 뱃사람들이 들어와 그 일부는 이 땅에 정착했다. 그 뒤에도 주석 광산의 노동자로 많은 이주민들이 중국에서 들어왔고, 그들은 화교사회를 만들어 갔다.
말레이시아의 이국적인 역사는 고대의 스파이스 루트Spice Route의 역사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시아 중심부에 전략적 크로스윈드crosswinds주1) 위치를 두고 있으며, 유럽, 동양, 인도 및 중국의 무역로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고대 해상 기지였다. 해상 허브는 말라카 남동부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 번성 한 항구가 생겨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곳이 되었다. 그것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항구로 말라카의 지위를 확립할 것이다. 세계 각국의 상인들은 말라카 기슭에 사업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국가의 역사, 문화, 종교, 전통 및 그 요리의 과정에 극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유산을 남겨 둘 것이다.
오늘날에는 향신료가 풍부하고 쉽게 구할 수 있지만, 고대에는 희귀하고 귀중한 맛이었다. 주로 부자나 귀족이 약이나 향수, 향의 핵심 성분이 되는 이들 향료를 찾는 것은 당연하며 방부제로서도 매우 매혹적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300년경 인도와 중국의 상인이 말레이시아 해안을 따라 무역을 했을 때 향신료 경로로 말레이시아의 말라카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400년경에 말라카는 향신료 루트의 핵심 항구로 자리매김하는데, 중국의 실크와 도자기, 티모르 산의 백단향, 유향, 몰약과 남부 아라비아의 향기로운 수지는 말라카에 집하되어 정향, 육두구, 후추와 같은 것들과 이들 향료로 교환하였던 것이다.
말레이시아의 주요 수출 품목 중 하나는 고추(주로 사라왁 산)인데, 이것이 전체의 1/4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국적인 이 향신료는 말레이 요리, 인도 요리 및 중국 요리의 한 부분인 커민, 고수풀, 육두구 및 정향나무와 함께 말레이시아 요리의 주요 향신료로 남아 있다.
말라카는 지난 과거에 중국,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에 의해 정복되어 왔다. 그래서 도시가 전략적으로 말라카 해협 국경에 있었다. 그것은 향신료 길을 따라 생긴 주요 항구였고 그 항구는 전 세계의 중국 정크와 향신료가 가득한 선박의 기착지였다. 이곳은 중국에서 온 실크와 도자기, 인도의 구자라트Gujarat에서 코로만델Coromandel주2), 직물과 녹나무는 보르네오에서, 티모르에서는 백단향, 육두구, 메이스mace주3), 정향을 수마트라의 몰루카Moluccas에서는 금과 후추, 말레이시아 서부에서는 주석이 들어왔다. 이 지역의 바다는 항상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고 선원들이 해변에 왔을 때 말라카는 안전한 장소였다. 말라카는 말라카 해협을 지배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장소였다. 그리고 그 해협은 향신료 무역에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말라카는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었다.주4)
인도에서 시작된 향은 의학과 종교, 문화로 체계화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와서는 예와 의전, 불전과 생활에 사용됨으로써 정신세계의 한 영역으로 다루어졌다. 그 후 일본으로 전파되어 오감의 중요한 부분으로, 의식과 놀이의 문화로 발전 계승되고 향도(香道)에까지 이르렀다. 특히 중국 당唐나라의 장안(長安)에서는 향 문화가 꽃을 피웠는데, 양귀비가 목욕했었던 전설의 화청지(華淸池)에는 향 목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고 한다.
향의 전래는 실크로드의 반대 방향으로, 주로 동남아의 향 생산지나 페르시아 쪽 나라들로부터 조공으로 다량의 향 목이 중국으로 들어왔다. 그것은 당나라 초기 화가가 그린 거대한 향 목을 멘 행렬의 그림에도 잘 나타나 있다 또한 현재 남아 있는 당나라 말기의 연석(宴席) 메뉴에 향 목이 있는 것을 보아 연회장에서도 향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주5)
수(隨)의 양제(煬帝)는 장안과 낙양 사이에 네 개의 운하를 만들었다. 길이는 370킬로미터로, 그 사이에 여러 개의 궁전을 향 목으로 짓고, 운하에 용선이라 부른 배를 띄우면 향을 십리 밖에서도 맡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양제의 초기에는 제사나 의식, 의학과 깊은 관계가 있었지만, 어느덧 향은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송나라 때 장준은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갑자기 출세를 하자 집안 구석구석에 큰 향로를 설치하고 하루에 수천 민(緡 : 화폐 단위)씩 향을 태우며 향운(香雲)이라고 자랑하다가 국고를 횡령하기에 이르러 파직당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일컬어 '장준 망국張俊亡國'이라고 부른다.
아무튼 옛날 기록을 보면, 값 비싼 침향으로 베개와 부채 살을 만들고, 옷에 사향으로 만든 노리개를 달았으며, 집 마루에 향나무를 간 것으로 보아, 향이 사치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향 품이나 향 제조법이 의학과 관련해 지금껏 전해져 오는 것도 중국의 다양한 문화와 역사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주6)
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청나라 소주(蘇州)에 살았던 심복(心腹)의 자서전인『부생 육기浮生六記』를 보면 일상생활에서의 향을 엿볼 수 있다.
운이는 언제나 침향과 속향을 사용했다.
먼저 이것을 밥솥에 넣고 속속들이 찐 다음,
화덕 위에 불에서 2센티미터가량 떨어지게 걸쳐 놓은 구리철사에 올려놓고, 천천히 불을 쬐었다.
그렇게 하니 향기가 더욱 그윽하고 그을음도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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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어떤 사람들이 잘 놓여 있는 것을 아무렇게나 집어서 향내를 맡고,
또 아무렇게나 갖다 놓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향을 다루는 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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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연꽃이 처음 필 때는, 꽃들이 저녁이면 오므라들고 아침이면 피어난다.
운이는 작은 비단 주머니에 엽차를 조금 싸서,
저녁에 화심(花心: 연꽃잎 속)에 놓아두었다가 아침에 꺼내어 샘물을 끓여 차를 만들기를 좋아했다.
그 차의 향내가 유난히 좋았다.
주7)
전통 중국의 관행은 종교적인 맥락에서 개인 향기의 사용을 강조했다. 개념은 세속적인 사용에도 심오한 영향을 미쳤다. 변화하는 계절에 따라 불쾌감을 주는 여러 가지 냄새를 포함하여 특정 종류의 냄새를 연계시키는 조기 삼투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외국 향신료와 방향족이 처음 중국에 도착했을 때가 한 무제주8) 통치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통치력의 확산을 위한 새롭고 강력한 향기가 개발되었다. 이것은 차례차례로 개인 향기 장치 및 향 버너의 보급으로 중국의 물질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었다.주9)
경제적으로 중요한 실크로드와 향신료 무역 루트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차단되었다가, 1453년 비잔틴 제국이 무너지면서 처음에는 아프리카 주변의 항로를 발견하고 항해의 시대를 촉발시키면서 탐험과 모험에 박차를 가했던 것이다.
향신료 거래는 주로 아시아 , 동북 아프리카 및 유럽의 역사적인 문명 간의 무역을 말한다. 계피 , 계수나무 , 카다몬 , 생강 , 후추 , 심황과 같은 향신료는 동양에서 상거래를 위해 오래전부터 알려져 왔다. 이러한 향신료는 기독교 시대가 시작되기 전에 중동으로 향했는데 이 향신료의 전설은 상인들에 의해 환상적인 이야기로 재탄생되기도 했다.
그리스 – 로마의 항로는 로마에서 인도를 따라가는 항로였다. 지난 첫 천년 동안의 인도와 스리랑카로 향하는 항로는 홍해의 해상 무역의 지배력이 강했던 인디언들과 에티오피아인들에 의해 통제되었다. 악숨 왕국주10)은 1세기경에 홍해를 개척했다. 그 후 이슬람권이 성장하면서 7세기 중반까지는 아랍의 무역상들이 해상 항로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아랍 상인들은 결국 레반트Levant주11) 와 베네치아Venetian 상인을 통해 유럽으로 물품을 팔았으나 오스만 투르크족의 등장으로 1453년까지 바닷길을 끊었다. 중세시대에는 이슬람 교역자들이 극동의 원산지 지역을 두드려 인도양의 무역거래에서 페르시아만과 홍해까지 인도양의 해양 향신료 무역 루트를 지배했다.
유럽의 무역 개척자들에 의해 무역의 중심은 바뀌었으며 양념 무역, 특히 검은 후추가 유럽 상인들에게 주요한 거래 물품이 되었다. 희망봉을 경유하여 유럽에서 인도양까지의 케이프 루트는 1498년에 포르투갈 탐험가인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에 의해 개척되어 무역을 위한 새로운 해운 항로가 되었다.
로마는 5세기에 양념 무역에서 한 역할을 했지만, 아랍인과 달리이 역할은 중세를 거치지 않았다. 이슬람의 부상은 유대인과 아랍인 상인 특히 이집트부터 마침내 레반트를 경유하여 유럽으로 물건을 옮겨 가면서 무역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8세기부터 15세기까지 베네치아 공화국은 중동과의 유럽 무역의 독점권을 행사했다. 향료 , 허브 , 마약 및 아편과 관련된 실크와 향신료 무역으로 이 지중해의 도시 국가는 놀랄 만큼 풍요롭게 되었다. 향신료는 의약품에 사용되는 중세 시대의 가장 비싸고 수요가 많은 제품 중 하나였다. 그것들은 모두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수입되었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오스만 제국이 생길 때까지 유럽을 통해 물품을 유통시켰고,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멸망하자 육지와 해로를 연결하는 유럽인들은 이 무역에서 배제되었다.주12)
포르투갈이 아시아에 도착하기 전인 1400년대부터 이미 중국은 정화(1371-1433)가 이끄는 원정대를 서쪽으로 보냈다. 정화 장군의 원정대는 향신료 무역의 장악이라기보다는 명나라의 힘과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정치적 원정이 목적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정화의 원정으로 중국은 인도양에서 향신료를 비롯한 물품의 교역로를 장악할 수 있었지만 정화의 성공은 내치를 중시하는 성리학적 정치제도를 표방하는 조정의 문제로 해상활동은 중단되었고 그 기록마저도 파기되었다. 이 사건은 결국 유럽이 아시아 향료 루트를 손쉽게 지배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1) 골프장의 코스에 부는 바람으로, 왼쪽에서 오른쪽 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부는 바람. 시합에서는 바람의 방향에 따라 공의 낙하지점이 달라지기 때문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바람의 방향이 움직이는 곳. 다음
2) 인도산 흑단의 일종
3) 육두구 나무에 열리는 육두구의 가종피를 말려 만든 향신료
4) http://www.langkawi-gazette.com.
5) 송인갑, 앞의 책, 218.
6) 송인갑, 앞의 책, 218-219.
7) 심복(心腹).『부생 육기(浮生六記)』. 지영재 역. 을유문화사, 1999. 59
8) 한무제 유철(Han Wudi BC 156년 7월 30일 ~ 87년 3월 29일) 유학을 바탕으로 하여 국가를 다스렸으며 해외 원정을 펼쳐 흉노를 크게 무찌르고 남월, 위만조선 등을 멸망시켜 당시 한족 역사상 두 번째로 넓은 영토를 만들어 전한의 전성기를 열었다.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요동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기도 했다. 진시황제·강희제 등과 더불어 중국의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9) Milburn, Olivia, “Aromas, Scents, and Spices: Olfactory Culture in China before the Arrival of Buddhism”, Journal of 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Ann Arbor136.3 (Jul-Sep 2016): 441-464.
10) 기원전 550년경에 셈족 계열의 민족이 서아시아의 농법과 철의 기술을 가지고 홍해를 건너, 오늘날 에티오피아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기원전 120년경에 악숨을 도읍으로 하여 왕국을 건설하였다. 기원후 1세기경에는 에티오피아 고원 이외에 북동부의 다나키리 사막에서 동부의 소말리아, 홍해를 넘어 아라비아 반도에까지 그 세력을 확대하였다. 악숨 왕국은 상아, 노예, 흑요석 등을 수출하고, 이집트로부터 의복, 유리 제품 등을, 인도에서는 철과 면포를 수입하면서 교류와 무역이 왕성하였다. 다음
11) 베네치아 상인을 비롯한 무역상들이 십자군 원정 이후 티레·시돈 같은 도시들과 교역을 하게 되면서 이 말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소아시아와 시리아의 해안지방만을 가리켰으나 뒤에는 그리스부터 이집트에 이르는 지역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12) 프레드 차라( 2013), “향신료의 지구사”, 강경이 역, 휴머니스트, 145-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