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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1997 - 1편. 백수대신 배낭여행자

by 리즈 Mar 18. 2025

1997년 봄


G'day! 그다이!

Enjoy your holiday! 인조이 유어 홀리데이.

입국 심사대 직원은 별 다른 질문도 없이 여권을 휘휘 넘겨 6개월을 체류기한으로 하는 스탬프를 쾅 찍어주었다. 두근두근. 잘못한 것도 없이 괜히 쫄렸던 마음이 호주의 햇살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목적도, 대책도 없었다. 그저 한국을 떠나고 싶었다. 잘 다니던 직장을 포부도 당당하게 그만뒀지만, 다음 갈 길을 정하지 못해 아르바이트만 전전하던 때였다. 뭐라도 해야 하는데 아무거나 하기는 싫었다. 주변 사람들의 걱정과 조언에 갈팡질팡하는 것도 지겨웠다. 뚜렷한 직업도 목표도 없는 내가 창피했다. 그래서 도망쳤다. 호주나 가자. 당분간 배낭 여행자가 되자.


문제는 돈이 너무 없었다. 통장의 잔고를 털어 왕복 비행기 표를 사고 남은 돈을 호주 달러로 바꾸니 250달러 정도가 주머니에 있었다. 어떻게든 버티다가 도저히 못 살겠으면 돌아가자는 심산이었다. 도움받을 곳 하나 없는 낯선 땅에 거지꼴로 놓여지면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서바이벌 게임 하는 심정으로 호주에 첫 발을 내 디뎠다.


공항 게이트를 나오자마자 밀려온 감정은 설렘이 아닌 외로움이었다. 환영 피켓을 든 사람들이 쭈욱 서 있었다. 누군가가 나를 마중 나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어디로 가지? 일단 숙소를 예약해야 했다. 시내로 가는 버스 정류장 표지판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 보니 공항 한쪽에 전화기가 쭈르륵 놓인 코너가 눈에 들어왔다. 다가가보니 작은 호텔과 백패커스 광고판이 수십 개 모여있고, 각 광고판마다 수화기가 하나씩 걸려 있었다. 핸드폰이 없고, 인터넷 예약도 없던 시절. 공중전화로 일일이 전화를 걸어 숙소 문의를 할 필요가 없도록 수화기만 들면 바로 숙소와 연결되게 해 놓은 키오스크였다. '이래서 호주를 배낭여행객의 천국이라고 하는구나.' 감탄하며, 숙소 정보를 하나하나 살폈다.


가난한 삶은 심플하다. 긴 고민이 필요 없다.


$15 per night 가장 저렴한 곳.

레드 핫 칠리 패커스 (Red Hot Chilly Packers).


숙소 이름도 마음에 쏙 들었다. 2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으니 훌륭한 작명이다.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레드핫칠리 패커스!"

"방 있어요?"

"도미토리 베드가 있어요."

"15달러예요?"

"믹스드 돔은 15불. 여자 돔은 18불이에요."


한 방에 여럿이 자는 숙소가 있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 도미토리가 뭔지. 믹스드 돔이 뭔지. 아예 감도 못 잡았다. 하지만, 나는 서바이벌 여행자. 묻고 따질 것도 없다. 무조건 싼 곳으로. 어디서든 잠만 잘 수 있다면 그걸로 오케이.


경쾌한 목소리의 매니저는 곧 데리러 갈 테니 지금 그 자리에서 꼼짝 말고 기다리라고 했다. 그렇다. 1997년의 호주는 천국이었다. 하룻밤 15불짜리 숙소에서도 공항 픽업을 공짜로 해 줬다.


배낭을 깔고 앉아 40여 분을 기다렸다. 맨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 자기 키 만한 배낭을 짊어진 사람들. 나처럼 바닥에 앉아, 또는 반쯤 누워 사과를 먹는 사람들. 호주의 공기. 호주의 냄새.


모든 순간은 딱 한 번뿐이라지만, 유독 선명하게 가슴에 콕 박혀 언제라도 꺼내 들면 그때로 돌아간 듯 마음까지 요동치는 순간이 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떠나온 여행, 공항에 서서 숙소 주인을 기다리던 스물두 살의 나. 광활한 허허벌판 앞에 홀로 서 있는 듯한… 그때 그 기분은 지금도 생생하다. 외롭고 두려우면서도 왠지 멋진 사람이 된 것 같은.... 진짜 어른이 되는 관문 앞에 선 기분. 그런 종류의 설렘은 정말 그때 딱 한 번뿐이었다.


Chat GPT 그림Chat GPT 그림


설렘이 절망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호스텔 매니저의 덜컹 거리는 트럭을 타고 도착한 숙소는 조금… 아니, 많이 당황스러웠다. 벽면에 가득한 낙서들. 녹슨 철문과 어둡고 좁은 복도. 매니저의 밝고 친절한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우울한 리셉션.  


그는 여권을 요구하고 복사기에 넣었다. 삐걱 거리는 벽장을 열어 보푸라기가 잔뜩 일어난 담요와 베개를 내밀었다. 욕실과 화장실, 주방은 공용이고 식기가 필요하면 보증금을 맡기고 빌릴 수 있다고 했다.


애써 밝은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말한 뒤 담요와 베개를 들고 그가 알려 준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철재 이층 침대 세 개가 꽉 들어찬 작은 방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왈칵 눈물이 솟았다.


‘집에 가고 싶어.‘


- 리즈 -



* 일주일에 두세 편씩 연재예정입니다. (되도록이면…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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