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말 일제 치하, 장정들이 둘러멘 가마 하나가 낙동강변 작은 마을을 막 벗어나고 있었다. 예닐곱 살 조그만 꼬마가 뒤를 따르며 울었다. “고모야~ 가지 마~ 나랑 같이 살자~ 어어엉” 딸꾹질하듯 숨을 들이켜면서 서럽게 울었다. 아이의 아버지가 웃으며 아이를 안아 들었다. 뭐라고 귀에 대고 얘기하더니 아이의 손을 잡아들어서 가마를 향해 흔들었다. 아이는 아버지의 손에서 자신의 손목을 빼내면서 다른 손으로 연신 눈물을 닦았다.
삼대가 사는 집의 장남에게 시집을 온 그녀는 캄캄한 새벽에 제일 먼저 일어났다. 옷매무새를 바로 하고 작은 거울을 보며 머리가 아프도록 비녀를 맵싸게 꽂았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밥을 안치고 소죽을 끓였다. 가뿐가뿐 걷는 며느리의 모습을 보며 시아버지는 흐뭇한 웃음을 짓곤 했다. 기대에 찬 눈길에 실망의 빚이 서리는 것이 죽도록 싫어서 그녀는 거듭 자신을 다그쳤다. ‘잘했다’ 칭찬의 말이 간절하게 고팠는지도 몰랐다.
남편은 호인이었다. 하지만 농사일과 살림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술과 사람을 너무 좋아했다. 남편의 일도 그녀의 차지가 되었고 그녀는 이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저 따르고 치르고 해냈을 뿐이다. 힘든 시집살이에 고향집과 부모님 그리고 사랑스럽던 어린 조카가 떠오를 때면 아궁이에서 나오는 매운 연기 때문이라며 눈물을 훔쳤다.
시부모님의 간절한 소망에도 아들은 하나만 생겼다. 소나무에 올라가서 갓을 안고 내려오는 태몽을 꾸고 낳은 아들은 늠름하게 자라서 키도 크고 잘 생겼다. 그녀는 갖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아들 하나 바라보며 그 모든 것들을 이겨냈다.
전쟁과 보릿고개로 사람들의 목숨이 덧없이 사라지던 시절, 살아남는다는 것은 치열한 투쟁이었다. 그녀는 해방이 되고 일본사람들이 떠나자 진해 장옥 빈집들을 돌며 유리창을 뜯어서 팔았고 한국전쟁 통에는 미군 보급품을 팔았다. 큰딸이 동생들을 챙길 수 있을 나이가 되자 대야를 머리에 이고 생선행상을 다녔다. 그렇게 차곡차곡 모은 돈으로 논밭을 사서 늘리고 자녀들 학교도 보냈다.
어느 날 작은 동서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일본으로 돈 벌러 떠난 작은 도련님이 그립고 보고 싶어서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가 서러워 자녀 둘을 끌어안고 우는 날이 잦았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여기던 그녀는 어느 날 새벽 외양간에 있던 소를 끌고 장에 가서 팔았다. 남편이 있는 곳으로 건너가라며 소 판 돈을 동서에게 건네주었다. 소가 없어진 걸 안 시아버지는 사연을 듣더니 천둥 같은 야단 대신 ‘남자로 태어났으면 정말 큰일 냈을 사람이네....’하고 혀를 끌끌 찼다. 그 소는 그녀가 행상을 하며 어렵게 모은 돈으로 시아버지에게 안겼던 송아지였다.
시집 장가 다 보내고 손주들도 한참 자라나서 이제 살만하다 싶었을 때, 자신이 의지하고 기대하던 자랑스러운 아들이 갑자기 죽었다. 그녀는 하늘이 무너진 듯 허물어졌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 가며 뒷바라지했던 아들이 아니었던가. 그녀에게 하나밖에 없던 아들은 자신의 꿈, 소망, 기도였고 가시밭길 같은 인생을 비추는 등불이었다.
그녀는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대학을 다니던 나는 군에 입대했다. 특박을 자주 나올 수 있는 데다 집 근처에 배치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공군을 선택했다. 아들을 잃고 상심이 큰 할머니 곁을 조금이나마 지켜드리고 싶어서였다.
해군 장병들이 나무로 배를 만들듯, 당시 공군에서는 캐노피를 얻어서 반지를 만드는 관행이 있었다. 캐노피는 전투기에 탄 조종사를 보호하는 투명한 강화플라스틱이었다. 가운데 구멍이 뚫어져 있는 조그만 조각을 나도 하나 얻을 수 있었다. 상당히 단단한 재질이라 굵은 사포에 갈아도 잘 깎이지 않았다. 여러 날 공을 들여 조금씩 갈아서 반지 모양이 되면, 가는 사포로 윤을 내서 마무리했다. 사람들마다 솜씨가 달라서 어떤 사람들은 전문가처럼 아주 가늘고 정교하게 다듬어내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투박해서 누가 봐도 아마추어가 만든 것이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나는 후자에 속했다.
장병들은 하늘을 나는 전투기의 캐노피로 만들었다는 의미를 담아 자신의 연인이나 가족에게 반지를 선물하곤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선물 받은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초등학교 문구점에서 파는 플라스틱 반지와 다를 바 없이 보였을 터였다. 초등학생이 만든 종이 카네이션처럼, 캐노피 반지는 만든사람도 그것을 받는 사람도 의미만을 생각했다.
특박을 나왔을 때 완성된 반지를 할머니께 선물했다. 반지를 받아 든 할머니는 오랜만에 웃으셨다. 다행히 약지에 꼭 맞았다. 반지가 주름진 손가락에서 투명하게 반짝였다. 눈에 잘 띄지 않아 얼핏 보면 무얼 착용을 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할머니는 끼고 있던 금반지를 빼내고 손자가 직접 만들어준 캐노피 투명반지만 끼셨다.
장신구는 몸을 치장하여 아름답게 꾸미거나 과시하기 위한 기능이 있다. 금이나 은 그리고 다이아몬드 등 귀금속이 주로 쓰여왔다. 착용을 하면 눈에 띄어 사람을 돋보이게 하고 또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역할도 한다. 하지만 내가 만든 투명한 반지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옷처럼 존재감이 없이 초라했다.
몇 달 후 제대를 했다. 집에 돌아와 할머니의 손을 보니 반지를 낀 손가락이 짓물러 있었다. 깜짝 놀라 자세히 살펴보니 반지가 꼭 끼는 데다 반지 모서리의 곡면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그 부분에 닿은 피부가 벗겨졌던 것이었다. 즉시 반지를 빼고 약을 발라 드렸다. 왜 진작 그까짓 것을 벗어버리지 않고 이렇게 손가락이 짓물러지도록 끼고 계셨냐고 물었다.
“네가 공들여 만들어 준 건데 어떻게 빼겠냐?”라고 반문하셨다. 나는 목이 메어서 반지를 버리라고 버려버리라고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내 청춘의 미숙함과 어리석음으로 빚어진 투명반지는 할머니의 손이나 외모를 돋보이게 하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신이 평생을 지니고 실천했던 희생과 사랑을 처연하면서 도드라지게 보이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유품을 정리하다가 낡은 서랍장 옷 밑에서 복주머니 하나를 발견했다. 주머니를 열어서 내용물을 꺼내 보니 귀금속 장신구들이 나왔다. 금반지 두 개, 백금 반지 하나, 목걸이 하나 그리고 뭔가 툭 하고 떨어졌다. 내가 캐노피로 만들어 드렸던 투명반지였다. 손가락이 짓물러졌을 때 버리라 했는데 고이 보관해 놓으셨던 것이다. 그걸 보는 순간 나는 목놓아 오열하고 말았다. 가마에 실려 시집갈 때 뒤따르며 울던 조카처럼 제대로 된 효도 한 번 못 해 드린 아쉬움과 회한으로 몸을 흔들거리며 꺽꺽 붉은 울음을 길게 울었다.
달콤한 아카시 꽃 향기가 밤공기를 적시면 아버지의 기일이 멀지 않았다. 온통 꽃으로 뒤덮이는 계절이 아프게 다가오면 옛 가사체 소설을 글인지 흐느낌인지 소리 내어 읊조리시던 할머니의 애절한 노래가 나의 뼈마디 어디에선가 흘러나온다. 가정의 달 오월에는 가슴이 시린 사람들의 마음에도 붉은 꽃이 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