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아침 일찍 정원을 둘러보았다. 장미가 활짝 피어나서 은은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 황홀하게 하였고 꽃양귀비와 황금 낮달맞이, 그밖에 다양한 꽃들이 정원 여기저기에서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매일 보는 정원이지만 계절과 시간에 따라 변하면서 빚어내는 아름다움은 언제나 감동을 준다. 그럴 때면 종종 드는 생각이 있다. ‘이런 아름다움을 우리만 즐기기엔 너무 아깝다!’
정원을 가꾸는 행위는 그 자체로 자연을 확장하는 것이고 우리 삶의 공간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다. 여타 다른 취미활동들이 개인적인 차원에 머무르거나 탄소를 소비하는 일들인 경우가 많은데 정원을 가꾸는 것은 오히려 그 반대이다.
정원 가꾸기는 심신을 안정시키고 공기를 정화하며 탄소를 포집하는 부수적 효과를 거둘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비와 벌 그리고 새들을 불러들이고 사람까지 찾아들게 하는 매력적인 일이다. 단점이 하나 있다. 일이 고되다는 것이다. 그거 빼고는 다 괜찮다.
정원을 가꾸는 사람들에게 정원은 하나의 작품이다. 애써 만든 작품은 전시를 하고 싶은 법이다. 정원을 개방한다는 것은 사생활과 개인 시간 등의 희생을 수반한다. 부동산중개소에 자신의 집을 매물로 내놓는 일과 비슷할 것이다. 모르는 사람들이 집을 구하려고 찾아 들 듯 정원을 구경하려고 모여들 테니 말이다. 미술작품은 전시실에 걸어 놓고 정장을 한 채 손님을 맞으면 되지만 개인 정원은 자신이 생활하는 집에 붙어 있는 공간이라는 사실 때문에 개방을 선뜻 행하기 어렵다. 보디빌더가 무대에서 옷을 벗어야 하듯, 자신의 사적인 공간과 행위도 일정 부분 공개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원 개방은 사실 지역 공동체에 기여하는 일이기도 하다. 정원문화를 공유하고 확산하는 계기가 되며 아름다움을 함께 체험하고 여러 사람들과 교류의 장을 여는 공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정원 선진국 영국에서는 ‘오픈 가든’이 정원문화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한다.
우리 정원이 제대로 꼴을 갖추게 되면 언젠가 ‘오픈 가든(open garden)' 행사를 열어봐야지 하는 계획은 늘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토요일 아침, '모자라지만 한번 해보면 어때' 하는 아마추어리즘적 오기가 밑도 끝도 없이 생겼다.
몇 년 전 직무교육을 갔을 때였다. 성악가가 '예술의 이해'라는 과목으로 진행하는 두 시간짜리 강의 시간이었다. 강사를 청중에게 소개할 때 나중에 시간이 되면 노래 한 곡 부탁한다고 가볍게 농담처럼 요청했더니 그녀는 '사전에 협의된 바 없던 일‘이라며 정색을 했다. 강의가 끝났을 때 내가 다시 한번 노래를 부탁했더니 소프라노 성악가는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끝내 거절했다. 괜히 부탁했나 무안했고 혹시 결례를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예술을 업으로 영위하는 사람에게 그와 관련된 것을 불쑥 요구하는 것은 사실 예의를 벗어나는 일일 수도 있다. 우리는 노래를 쉽게 생각하지만 프로 가수에게는 진지한 행위일 테니 말이다. 강의 자리에서 미술가에게 그림을 한 번 칠판에 그려봐 달라거나, 변호사에게 변론을 한번 해보라거나, 의사에게 진료를 부탁을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프로 정원사가 아니다. 그날 아침, 누가 요청하거나 시키지도 않았는데 불쑥 갑자기 정원을 전격 공개하기로 결심했다. 준비가 덜 되었고 '사전에 협의‘되거나 계획된 일이 아님에도 말이다. 제대로 준비되면 하려고 먼 훗날로 미루어 두었던 것을 그날 아침 즉흥적으로 실행해 보기로 했다.
사실 휴일날 대문을 기웃거리며 구경을 요청하는 사람돌도 있었고 그들의 감탄과 칭찬의 말 그리고 우연히 지나치다 뜻밖의 행운을 얻었다며 기쁘게 떠나는 모습들을 경험했던 터라 준비 안 된 개방이 그리 부담스럽진 않았다.
창고에 넣어둔 종이박스 한쪽을 떼어와서 매직펜으로 큼지막하게 썼다. ’OPEN GARDEN' 그 밑에 한글로도 적었다. “정원을 구경하셔도 됩니다.” 공개시간도 적었다. ‘10시에서 12시, 14시에서 16시’. ‘길로만 다닐 것’ 등등 기타 지켜야 할 준수사항까지. 형식은 누더기인데 내용은 격식을 갖췄다. 아내에게 보여주었더니 깔깔거리며 웃었다.
대문 한쪽에 골판지 안내판을 끈으로 고정해 붙여두고 다른 문은 활짝 열어젖혔다. 손바닥을 탁탁 털면서 자신 있게 생각했다. ‘오전에 한 두 팀 오후에 대여섯 팀 정도 올 거야. 방문객들이 꽃과 나무를 가리키며 이것저것 물어볼 테니 설명을 어떻게 할지도 생각해 둬야겠군.’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큰길까지 나가서 대문을 향해 쳐다보았다. 너무 멀어서 글이 잘 보이지 않았다. 혼자 중얼거렸다. ‘올 사람은 오겠지.’
정원에서 일을 하면서 눈은 계속 대문을 향했다. 어디선가 사람 소리가 들리면 시선은 으레 대문을 향했다. 오전이 지나자 점심을 먹었다. 식곤증으로 졸려서 소파에 앉아 꾸벅거리다가 인기척이 들리면 대문 쪽으로 고개를 빼서 내다보았다.
관람 마감시간인 4시가 넘었다. 대문에 붙여 놓았던 골판지 안내판을 떼어내고 문을 닫았다. 그날 방문객은 아무도 없었다. 써 붙이지 않아도 찾아오는 사람들이 간혹 있더니 막상 열어놓자 한 명도 오지 않았다. ‘오픈 런’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단 한 명도 없었다니 씁쓸했다. 식당을 열 때 홍보와 마케팅이 그래서 중요한 것인가 보다.
“하나의 고상한 실패가 수많은 저속한 성공보다 훨씬 낫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가 한 말이라고 한다. 쓰레기 같은 진지함을 부여잡으며 안주하기보다는 과감하게 실행하고 때로 실패를 통해 뭔가 하나라도 배울 수 있다면 그것이 훨씬 더 낫다는 그의 말을 되새기며 ‘방문객 0명’으로 마감한 그날의 일을 위안으로 삼았다.
정원이 꼭 마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봄처럼 따스하고 아름다울 때도 있고 겨울처럼 차갑거나 황량하고 쓸쓸할 때가 있다. 때로는 태풍이 불어서 애써 가꿔놓은 나무와 꽃을 송두리째 망쳐 놓기도 한다. 작물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처럼 정원도 물을 주고 풀을 뽑지 않으면 엉망이 된다.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성찰하고 돌보는 노력이 있어야 맑아지고 밝아지는 것이 마음 아닌가 한다.
또 한 가지 더. 마음을 여는 일도 마음을 닫는 일도 남의 처지나 상황을 배려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어쩌다 오픈 가든’ 행사가 일러주었다. 내 좁은 시각과 착각에 갇혀서는 누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그 어떤 사람도 들일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관람시간과 준수사항까지 빼곡하게 적힌 골판지 안내판을 떼서 들고 오는 나를 보며 아내는 배를 잡고 웃었다. 그래도 웃음 하나는 찾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