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 마당에서 풀을 뽑고 있는데 “쿵”하고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니 유리창에 멧비둘기가 부딪혀서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죽지는 않았지만 부딪힌 충격에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갑작스러운 사태에 정신줄을 놓은 것이리라. 나는 모른 체하며 다시 돌아앉아서 풀을 뽑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도우려 하다가 오히려 스트레스를 줄 수 있으니 기력을 회복해서 날아갈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주는 것이 최선일 것이었다. 섣부른 위로보다 가만히 생각할 시간을 주는 게 더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다.
그때였다. 다른 비둘기가 “구구구”하고 근처 나뭇가지에 앉아서 울었다. 제 짝에게 어서 일어나라고, 날아올라서 곁으로 오라는 응원의 함성을 외쳐대고 있었다. 떨어져 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던 비둘기는 제 짝이 울 때마다 날개를 움찔거렸다. “구구구... 푸득” “구구구... 푸드덕” 짝이 보내는 소리 신호에 생존을 위한 반응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암수 한쌍에게 서로 연결되어 있는 저건 뭘까. 저 질기고 끈끈한 저건 도대체 뭘까.’
잠시 뒤 유리창에 부딪혔던 비둘기는 간신히 기운을 차렸는지 제 짝이 앉아 있는 나뭇가지 근처까지 날아올랐다. 비둘기 한 쌍에게는 보이지 않는 생명의 끈, 사랑의 인연이 서로를 끌어 주고 당겨 주면서 이어지고 있었다.
퇴근길, 사무실 앞 횡단보도에 멈춰 섰다. 내가 도착하자 바뀐 붉은 신호. 집에서 해야 할 일들,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들, 이런저런 생각들이 지구를 몇 바퀴 돌고 신석기와 AI를 넘나드는 동안 어느새 들어오는 초록색 불빛. 나의 왼발이 아스팔트 도로로 내디뎠을 때. 바로 그 순간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마치 정지화면처럼 생경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때는 온다.
도서관 나무의자에 짓무른 엉덩이. 더위와 추위 그리고 온갖 잡념들. 새벽에 오르고 한밤에 내려왔던 숱한 나날들. 매미의 울음소리, 옆사람의 코 고는 소리, 청춘의 페이지 가 넘어가는 소리들. 두근대는 마음으로 들여다보던 합격자 명단. 간첩의 난수표 같은 숫자들의 도열 속에서 의미 있는 하나의 수험번호. 그렇게 때는 온다.
길고 긴 추위, 쓸쓸한 정원. 애타게 기다리던 봄이 오고 드디어 핀 매화. 봄밤의 설렘과 축제의 열기 속에 영원처럼 아름다운 불꽃. 어느 날 바람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꽃잎, 꽃잎, 꽃잎들. 술잔 속 툭 떨어진 꽃잎 하나. 그렇게 때는 온다.
차가운 내시경 진료실 침상 위에 웅크려 누워있을 때 간호사의 한마디. “열까지 숫자를 세어 보세요.” 몇 번까지 세어야 죽음 같은 잠이 들까. “하나, 둘, 셋. 네에....” 그래. 정확히 넷까지 세다가 말았는데 왜 이렇게 잠이 안 들지? 뭔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살며시 눈을 떴을 때 입에 물린 재갈도 모니터 화면도 검사기기도 아무것도 없었다. 내 몸뚱이는 내시경 진료실이 아니라 커튼이 드리워진 회복실 침상에 홀로 덩그러니 있었다. 검사는 벌써 끝났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렇게 때는 온다.
삶의 어느 순간 커튼이 살짝 젖혀지며 무언가 느껴지는 때가 있다. 영화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스크린을 살짝 젖히고 빼꼼 내다본 순간처럼, 한창 열중하고 깊이 빠져 있다가 깨어나는 순간에 설핏 느껴지는 그 무엇인가가 말이다.
2014년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역작 인터스텔라가 생각난다. 웜홀에 빠진 쿠퍼가 5차원 공간인 ‘테서렉트’에서 시공간이 다른 딸에게 모스 부호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리학의 다중우주론과 초끈이론을 적용해서 만든 얘기라고 한다.
다중우주론은 우주가 단 하나만 있다는 기존의 상식과 달리 여러 개의 우주가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초끈이론에서는 이 세상 만물을 구성하는 최소단위는 입자, 즉 알갱이가 아니라 끊임없이 진동하는 끈으로 되어 있다는 주장이다. 물론 둘 다 아직 검증된 이론은 아니다.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사실은 보이지 않는 다양한 우주와 겹쳐져 있고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 그러다가 오감을 벗어난 육감에 의해 현실의 커튼이 살짝 젖히면서 그 이면이 느껴지는 순간이 오기도 할 것이다. 이유도 정체도 영문도 모른 체 말이다.
3차원인 택배 상자를 한눈에 다 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이리저리 돌려서 보는 수밖에 없다. 방법이 있긴 하다. 박스를 뜯어서 펼치면 2차원으로 바뀌고 그때 우리는 택배상자의 모든 면을 한눈에 다 볼 수 있다. 차원을 바꾸면 한눈에 볼 수 있다.
3차원인 우리의 우주와 삶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삶의 비밀과 실체를 꿸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바로 ‘인터스텔라’‘에서처럼 웜홀에 있는 '테서렉트'에 가서 5차원으로 보는 것처럼. 나의 인생 우리의 삶도 그렇게 한눈에 펼쳐서 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우주여행을 하기에 우리의 삶은 너무 짧다.
초끈이론과 다중우주를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면서 후다닥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가 급히 가스레인지의 불을 끄면서 말했다.
“아니, 감자 타는 냄새가 나면 불을 좀 끄지. 안에서 뭘 하고 있었누. 달나라에 갔다 왔어?”
감자를 불에 올려놓고 밖에 나가 빨래를 너는 새에 깜빡했다가 급히 들어온 아내의 지청구였다. 나는 뭔가 냄새가 나는 것 같았지만 생각에 빠져 있다 보니 느끼지를 못했던 것이다. 유리창에 부딪혀 눈만 껌뻑이던 비둘기처럼 오감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육감 운운하는 것인지.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이렇듯 멀고도 험하다.
최근 문해력, 즉 문장을 이해하는 능력이 화제로 떠오른 적이 있다. 그렇다면 문장이 아니라 삶을 제대로 이해하는 능력은 ‘삶해력’이라 이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실수와 후회, 상처와 고뇌, 그리고 외로움으로 뒤척이며 살아온 나의 속은 자해의 생채기가 가득할 뿐이다. ‘삶해력’을 기르는 것은 나와 이 세상을 제대로 이해해 보려는 노력일 터인데 나는 아직 ‘삶해력’이 많이 부족하다.
감자가 익어가듯 내 삶도 두루 평화롭고 아름답고 맛있게 무르익을 수 있을까. 바로 그때가 오기는 할까? 접시 건너편에 앉아 있던 아내가 끈을 당기듯 말했다.
“식기 전에 먹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