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내 마음속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기
얼마 전, 정식으로 MBTI를 받을 기회가 있었다. 온라인에서 간단히 할 수 있는 MBTI와 달리, 좀 더 시간을 들여 많은 문항에 답해야 하기 때문에 신뢰도가 높다고 한다. MBTI 해석을 해 주시는 전문가께서 사전에 추가적인 질문을 몇 개 하셨는데 나 자신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점수로 매겨보라고 했고 또 어떤 유형이 나왔을 것 같은지를 물어보셨다. 나는 점수로는 50점, 그리고 유형으로는 기존 온라인 간단 검사에서 일관적으로 나왔던 유형을 답했고 결과도 일치하게 나왔다. 나의 생각보다는 나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전문가께서는 설명을 덧붙이길, MBTI는 성격 유형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닌 경향성이며 "자기감(sense of self)", 즉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스스로 느끼고 인지하는 감각과 연결되어 있기에 이를 통해서 나 자신의 경향성에 대해 깨닫는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소위 특정 성격 유형의 모든 특성들이 나 자신에게 다 들어맞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설명해주었다. 즉, 내가 특정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하고 판단을 할지 높은 확률로 예측할 수는 있지만 항상 전지전능하게 100% 맞출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ㅇ유형의 모든 특성들이 나의 성격과 100% 일치하지는 않는 것이다. 사실 그동안 막연하게나마 내 성향은 이럴 것이다,라고 생각만 했었는데 이렇게 전문적인 설명을 듣고 나니 뿌옇던 머릿속이 조금이나마 또렷해지는 기분이 들었고 받아보길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자기감을 키우기 위해 나 자신이 어떤 것을 잘하는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찬찬히 뜯어보며 내 마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삶에 대한 고민들을 진지하게 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보면 정해진 궤도를 이탈하기 싫은 모범생 같은 태도로 그저 주어진 일만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좋은 대학에 가고, 그래도 이름이 알려진 회사에 가서, 남들이 보기엔 재미있어 보이는 일을 하고, 나름의 인정도 받는다. 그러나 아이를 낳은 이후로는 그동안 내가 걸어왔던 삶의 궤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내린 두 가지 결론.
첫 번째, "나, 바쁜 거 안 좋아하네?"
그동안은 일을 우선순위에 두고 살았다. 열심히 하면 언젠간 남들이 알아주겠지, 싶었던 것 같다. 소위 말하는 핵심 부서에 있던 적은 없었고, 그동안 거쳐왔던 부서들이 열심히 일해도 티가 별로 안 나는데 안 하면 티가 확 나는 곳이었다. 잘 보이지 않는 수면 밑에서 물장구를 엄청 열심히 치고 있는 백조의 물갈퀴처럼, 남들이 안 보는 곳에서 일이 제대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내 개인 시간을 투여해서라도 일을 했었다. 그리고 예전엔 다 그랬듯이, '나만 그런 건 아니니까', '원래 그런 업무니까' 하면서 그냥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입사 이후로 첫 휴직, 즉 육아휴직 기간을 보내면서 그러한 생각들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내 개인 시간까지 투여해 가며 일 해야 열심히 하는 것이라고, 그게 인정받는 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 업무는 내가 하니까 이 만큼 할 수 있는 것이고, 나는 이 업무에 필요한 존재이기에 다시 돌아와서도 회사에서는 이 업무를 맡길 것이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약 11개월간의 휴직 기간 동안, 내가 없다고 해서 그 업무가 안 돌아가지도 않았으며 수시로 메일함을 확인하고 업무와 관련된 사람들과 연락하는 일이 거의 없다 보니 항상 곤두서 있던 신경도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고 복직 후에 그동안 거쳐왔던, 실시간으로 바빴던 부서가 아닌 상대적으로 정해진 일정에 주어진 일만 하는 관리부서로 가게 되었고 그 부서에서 천천히 업무에 대한 감을 다시 익히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많이 갖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업무를 하면서 느꼈던 "매우 바쁨"의 실체가, 알고 보면 그저 나 스스로를 몰아붙이고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으려는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스스로를 바쁘게 만들어서 업무 외 나 자신을 돌아볼 시간을 주지 않았고, 그리고 그렇게 바쁜 나 자신이 굉장히 일을 잘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두 번째, "나의 삶에 가장 소중한 것은 회사 밖에 있다"
회사에 오래 다니면서 힘들 때도 있지만 그만큼 애정도 많이 생겼고, 좀 더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항상 있다. 사실 지금도, 회사에 다니고 있지 않은 내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고 이직을 생각만 해도 덜컥 두려움이 앞선다. 하지만, 회사와 나 사이의 균형을 잡아야 내가 회사에 좀 더 장기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동안 회사에서의 삶을 내 전체의 삶과 일치시키며 살았다. 나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했지만 같은 회사에서 10년 넘게 근속하다 보니 어느새 나 자신보다 회사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방향으로 변해 있었다. 회사가 힘들면 나도 힘들고, 회사가 기쁘면 나도 기뻤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동일시는, 회사를 다니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회사에 바라는 바가 많아지기 때문에 어느 순간 내가 원하는 만큼 회사에서 어떤 형태로든 돌려받지 못하면 마음이 힘들어진다. 나 = 회사가 아닌,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상호 간에 도움을 주고받는 형태가 정말 이상적인 회사와 나 사이의 균형이지 않을까. 기간이 정해진 일 등 특수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지만 내 모든 걸 바쳐가며, 즉 개인 시간과 체력, 정신적 에너지 등을 한계 없이 쏟아내 가며 회사 업무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나 아이가 생긴 이후에는 더더욱, 회사와 나 자신을 일치시킬수록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온전하게 아이에 집중할 수 없기에 균형이 쉽게 깨져버리곤 한다. 나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게 때로는 회사이고 업무일 수도 있지만 회사 밖의 삶에서 찾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회사에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내가 이 일을 안 하면 저 사람이 나를 일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나와 크게 관련 없는 일이지만 내가 한 마디를 덧붙이지 않으면 너무 관심 없는 것 아니냐며 욕먹지 않을까?' 하며 계산을 하기에 바빴던 것 같다. 그리고 그동안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들의 대부분이, 남의 생각과 판단을 신경 쓰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에게 바쁜 삶을 강요하는 사람, 촉박하게 회신을 요구하는 사람, 그리고 일부러 근무시간이 아닐 때 일정을 잡는 사람들 내면에는 "나는 이렇게 바쁘니까 일을 잘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바쁘게 일하니까 너도 바쁘게 일해야 마땅하다", "나의 바쁜 삶은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다"라는 잘못된 생각이 심어져 있는 것이다. 왠지 모르게 마음 불편한 사람, 그리고 같이 있기 싫은 사람의 특성을 따져보니 그러한 가치관을 은연중에 전달하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었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그 사람이 부정하거나 강요하기 때문에 일종의 인지부조화가 일어나 무의식 중으로 꺼림칙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겁먹는 것이 참 의미가 없었고, 크게 관련 없는 일까지 신경 쓰기에는 내 시간이 너무나 모자랐으며,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강요하는 사람들에게 내 신념을 굽히고 싶지 않다. 나는 나대로,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가장 우선순위에 놓고 일을 하는 것이 가장 행복하기 때문이다.
왠지 모를 막연한 불안감이 들 때, 그리고 여러 중요한 일이 한꺼번에 터져 수습을 해야 할 때 잠깐만이라도 내 마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내 마음의 목소리를 들을 때,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나의 가치관이 점점 더 뚜렷해질 것이고 이는 내 삶의 방향을 잡아주는 중요한 나침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