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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소방관 Aug 04. 2020

내가 있어야 할 곳

119 구조대원이 바라보는 스스로의 모습

 나의 첫 발령지는 부산진 소방서 구조대였다. 부산의 명동이라 불릴 만큼 유동인구가 많고 인구 350만 대도시의 중심지였다. 해군 특수부대(UDT)에서 부사관으로 6년을 근무하고 전역한 내가 마치 갓 군에 입대한 이등병처럼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며 구조대 사무실로 들어섰다. 낯설지만 선배들은 친절했고 딱히 적응이랄 것도 없이 바로 현장 업무를 시작했다.      


 자살을 암시한 사람이 집안에서 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는다는 신고가 나의 구조대원으로서의 첫 번째 출동이었다. 찢어질 듯한 사이렌을 울리며 도로를 내달리는 불자동차에 나는 타고 있었고, 찌들어 가시지 않는 불 내음이 가득한 소방차 안에서 선배들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흘깃거리며 일을 배워 나갔다.

 


    

 쉽지 않았다. 나는 119 구조대원이 되기 전까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다치고 죽는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쉴 새 없이 출동벨이 울렸고 그때마다 화재를 진압하고 사람을 구했다. 현장은 처참했다. 소방관이 되지 않았다면 평생 볼까 말까 한 장면을 연일 보게 되었다. 싸늘하게 식어 죽어 있는 몸, 뼈와 살이 드러나 고통에 울부짖는 산 자의 눈빛은 여전히 나의 기억 속에 켜켜이 쌓여있다.

      

 찌그러진 차 안에서 온몸이 짓이겨진 채 죽어가고 있는 교통사고 사망자, 보기에도 아찔한 고층의 아파트에서 스스로 몸을 던진 사람, 뜨거운 잿더미에서의 타다만 주검... 생의 모습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을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을 나는 잊지 못한다.   

  

 죽은 사람의 모습이 두렵지는 않았다. 다행인지 몰라도 살고 죽고 다치는 사고의 현장은 내가 이 일을 하는 데 있어 그리 두려운 곳이 아니었다. 사람 목숨이 재천(在天)임을 일찍이 깨달았는지 모르겠지만 피로 물들고 까맣게 그을린 현장은 나의 일터였고 현장에서 일하는 내가 진정한 구조대원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살리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가끔 나를 괴롭혔다. 내가 유일하게 두려워했던 것은 신고를 받고 달려가는 소방차 안에서 우리가 그들을 살릴 수 있을까 걱정하는 불안감이었다. 불가항력이라 하더라도, 어쩌면 살아있음이 고통스러운 삶이 될 수 있다 하더라도 심장이 뛰고 숨 쉬고만 있기를 바라며 현장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렇게 현장은 늘 치열했고 죽고 사는 것을 본다는 것은 현장의 일부분이었다.

     

 13년째 이 일을 하며 산 자보다 죽은 자를 더 많이 본 듯도 하다. 트라우마니 PTSD(외상 후 스트레스)는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있었던 들 내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다들 그려려니 하며 지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난 지쳐가고 있었다. 매너리즘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10년 넘게 현장을 뛰어다니니 체력이 약해진 듯도 했다. 이유야 어찌 됐든 현장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사는 이 일을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던 차에 소방학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교관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소방학교에서 근무하시는 친한 선배님이 결원이 생긴 자리에 나를 추천했던 것이다. 신임 소방관들부터 현직의 선후배 소방관들까지 다양한 실무적 교육을 담당하는 구조 교관으로 갈 기회가 생긴 것이었다.  

    

 현장을 뒤로하고 싶은 내 마음은 동했고 선뜻 제의를 수락했다. 한 달쯤 후 발령 날 것을 기다리며 일상의 업무를 계속했다. 십 수년을 그렇게 뛰었으면 됐으니 이제 현장을 잠시 떠나보자라는 마음이 부쩍 들었다. 동료들에게는 발령 공문이 날 때까지 비밀로 하고 따로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는데 왜 그런지 모르게 마음이 허해져만 갔다. 거기다가 출동을 알리는 벨소리에 즉각 반응하던 몸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꾸물대기도 했다. 현장에서 동료들과의 다이내믹한 팀워크도 나 때문에 어긋났다. 팀장님의 지시에 후배들을 리드해야 할 나의 몸은 갈수록 흐느적거리며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암만 봐도 내가 아닌 듯했다.

     

“행님.. 뭔 일 있습니까? 와이리 허둥댑니까? 행님답지 않게...”  

   

 내가, 내가 아닌 것을 후배들도 눈치를 챈 것일까?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밀려왔다. 나의 동료들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었고 나는 그런 나를 현장 밖으로 밀어내려 했다. 현장은 내가 있어야 할 가장 적합한 곳임을 애써 부정하려 했으니 십 년이 넘게 길 들여진 내 몸이 생각과 따로 놀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에 같은 길을 모셔다 드리려던 팀장님이 나에게 물었다.  

  

 “김 부장... 어딜 가든 너의 선택을 존중한다. 다만 정말 네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는 깊이 한번 생각해보고 결정했으면 좋겠다”  

   

 가슴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왔다. 팀장님과 팀원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을. 누군가가 이야기를 해주어 내가 소방학교로 가게 된 것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의 내 모습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내 마음이 떠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한참을 고민했다. 

무엇이 두려워서, 무엇이 그리 싫어서 나는 현장을 떠나려 했을까?

내가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일임을 뻔히 알면서 왜 일탈을 꿈꾸었을까?

      


 

들끓는 생각에 혼란스러워할 때쯤 소방학교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강윤아. 나가려던 교관이 계속 학교에 머무르게 되어 너는 다음 인사 발령 때 다시 추천할게. 미안하게 됐다” 

아니다. 잘됐다. 차라리 거부당하는 것이 속 편했다. 


 며칠 동안 내가 아닌 나로 사는듯한 이 모습이 꿈처럼 느껴졌다.     

피 튀기는 구조현장에 서 있는 내가 바로 나였던 것이다. 나는 사람을 구하는 현장이 어울렸고 내가 있어야 할 곳이 바로 현장이었다.     

삼국유사의 조신의 꿈처럼, 그렇게 잠깐 꿈꾸듯 지나간 그 시간들이 지금 생각해보면 머쓱하기만 하다.

     

 나다운 것이라...

당장이라도 벨이 울리면 소방차에 올라타 누군가의 가냘픈 외침 속으로 달려가는 것.     

그게 나다운 것이다.     

나는 119 구조대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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