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소방관 Oct 16. 2020

작은 수첩에 적힌 나의 지난 날

남겨진 한 줄 글의 힘


출퇴근 때 늘 매고 다니는 가방이 사무실 한구석에 있습니다.

며칠째 이어지는 훈련 때문에 집에 들어가지를 못해 후배의 책상 옆에 올려놨었습니다.

훈련 때 입으려고 집에서 가져온 티셔츠가 가방에 있어 열어보았습니다.

셔츠를 꺼내려고 가방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가방 속 여기저기에 온갖 잡동사니가 너저분하게 펼쳐있길래 하나씩 꺼내보았습니다.

젤 처음 눈에 띈 게 파란색 수첩입니다.

 몇 년 전 메모 같은 거 끄적이려 가지고 다녔는데

어디 갔는 지도 모르고 있다가 이제서야 만났습니다.


수첩을 펼쳐보니 별거 없습니다.

개발새발 써놓은 글씨가 내 글인데도 알아보기 힘드네요.

여기저기 업무 관련 메모가 대부분인데 잊어먹지 않으려고

써놓은 듯한 글들이 넘쳐납니다.

그런데 다 잊어먹고 있는 지금을 보면 써놓고 다시 펼쳐보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서민 교수님의 책을 읽고 몇 자 적었는데 이거는 기억이 나네요.

워낙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서요.


파란색을 좋아해서 파란색 글이 거의 다입니다.

그렇게 파란 글들이 제 맘대로 갈겨져 있습니다.


그러다 본 것이 제 속내에 대한 글도 있네요.

3년 전 소방서에서 실시하는 정기 심리 상담을 받고

그날 쓴 거 같습니다.

나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며 심리상담사에게 술에 대한 질문을 한 적 있습니다.

물론 내가 아니라 친구의 이야기라고 하면서요.


매일 소주 한병과 피처 하나를 마시는 친구가 있다.
술자리가 있는 날은 기억이 끊어질때까지 마신다.
이 친구는 괜찮을까?


내 말을 들은 심리상담사는 그 정도면 '알코올의존증'이 의심되니

병원을 가보라고 했습니다. 전문의와 상담을 해보는 게 좋다면서요.


순간 마음이 뜨끔했습니다. 저도 그럴 줄 알았지만 직접 그런 말을 들으니

불안이 엄습합니다. 상담사는 제가 친구의 이야기를 했다고는 하지만

아니라는 것을 아는 듯했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에 서둘러 상담을 마쳤고

그렇게 돌아앉아 이 글을 쓴 듯합니다.


그 후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올해 1월 1일부터 술을 끊었습니다.

다들 어떠한 계기를 묻는데 딱히 그런 거 없습니다.

위에 말했듯 저 정도로 마셔대는 일상이 그냥 싫었습니다.

전문의의 진단까지도 갈 필요가 없이 제가 봐도 알코올중독 수준이 맞았죠.

끊어야 했고, 그렇게 했습니다.


이제 술 마시는 시간에 책 읽고 글 씁니다.

삶이 기적적을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변한건 사실입니다.

지역 독서모임에 나가고, 온라인으로도 독서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제 블로그 글을 보시고 온라인 강의도 부탁하십니다.

개인적으로도 연락이 오셔서 책과 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놀라운 일이죠.


물론 중요한 자리에 나가 술잔을 받아 입에 대기는 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조직에 몸담은 직장인이고

또 귀한 분이 주는 잔이기에 잔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분께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말을 전하였습니다.

이해해 주셨고 고마웠습니다.


꺼내본 수첩을 보며 과거 제가 어찌어찌 힘든 일을 겪어왔는지

죽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와서 보니 별일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내 부질없는 생각처럼 느껴집니다.

다 그렇게 되려고 될 일이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메모광은 아니지만 수첩의 작은 글 덕분에 오늘도 글을 씁니다.

'메모 독서법'이라는 책을 읽고 잠깐잠깐 남겨지는 글들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알게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나의 기억이 종이에 적히며 오롯이 기억되길 바랍니다.

'나의 지난날'이 그렇게 남겨지게 해보고자 합니다.


이전 05화 불후(不朽)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