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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er Lucy Mar 27. 2024

23화. 귀신아, 물렀거라! 나에겐 엄마아빠가 있다!

우리 아빠의 코 고는 소리 맛 좀 볼 테야!

지난 주말,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축축 처졌다. 그날 외출은 모든 게 순조로웠다. 오랜만에 성수동에서 재밌는 것들도 많이 보고, 만난 지인이 맛있는 식사도 사주어 마음도 위장도 든든한 하루였다. 변수는 마지막에 생겼다. 지인 중 한 명이 만남 때마다 이야기한 방탈출이 화근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방탈출 이야기가 나오길래 별생각 없이 동의했는데, 그 테마가 호러 중의 호러였다. 방탈출을 제안한 당사자도 그 정도로 무서울 줄 몰랐다며 사과했지만 그 후유증이 며칠은 갈터였다. 내부 공간도 워낙 좁았기에 생전 겪어보지 못했던 폐쇄공포증을 엘리베이터 안에서 겪을 뻔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집에 엄마아빠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야기하기 민망스럽지만.. 그날 나는 엄마에게 "방문을 열고 자달라"고 요구했다. 쪽팔림에 목 뒷덜미에 열기가 확확 오르지만 실제로 그랬다. 아빠의 코 고는 소리라도 들어야 무섭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도 중간에 진땀을 뻘뻘 흘리며 깨고 몇 시간 후에 겨우 잠들었지만, 어쨌든 아빠의 코 고는 소리는 효과가 있었다. 다행인지 모르겠다만 현대인으로서 고뇌할 게 하도 많아서인가, 방탈출의 기억은 서서히 옅어져 며칠 만에 자취를 감췄다. 그 며칠간 엄마아빠가 방문을 열고 잤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일화를 들으신 분들이라면 '와, 완전 쫄보 중의 쫄보네'라고 하실 수 있겠다. 부정하지 않겠다, 나는 쫄보다. 쫄보로 태어나서 쫄보라고 하는데 왜요! 운전할 땐 무모하리만큼 겁이 없는 나지만 잔인한 거, 귀신 나오는 거, 피 나오는 거, 사회 기사에 나오는 범죄 등을 제일 무서워하는 쫄보는 부모님과 붙어 자진 않더라도 존재 자체만으로 위안을 받을 때가 많다.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새벽 2시쯤, 위층에 사는 남성이 술이 거나하게 취해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른 적이 있었다. 현관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고 있던 (가뜩이나 예민한) 나는 그 소리에 놀라 잠이 깼고, 그 사람이 문을 열어달라고 하는 소리를 성난 고양이처럼 온몸의 털을 한껏 세워 듣다가 "여기 nnn호에요!"하고 쫓아냈다. 그리고 난 그날 온몸에 두드러기가 났다. 부모님이 다른 방에서 자고 있었으니 그 정도지, 혼자 살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그날 밤은 물론이고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며 두려워했으리라.


누군가 "너는 왜 자취를 안 해?"라고 물으면 대외적으론 "집값이 비싸서"라고 하지만 실제론 "혼자 살기 무서워"인 나에게 부모님과 함께 사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무서운 생각이 몸을 뻣뻣하게 만들더라도 방문만 열면 요란스레 코를 고는 아빠와 뒤척이는 엄마가 있고, 그건 상당한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이 안에서는 무서운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야, 같은 느낌. 만일 혼자 살았다면 방탈출을 한 그날은 집에 들어서지 못하고 밖에만 맴돌다 본가에 가버렸을지도 모른다. 왜 왔냐는 엄마의 물음엔 멋쩍게 "그냥 왔어~"하겠지만 곧 미주알고주알 이게 무서웠고, 저게 소름 돋았다는 이야기를 하며 한참을 쏟아내겠지. 하지만 그런 무서움이야 금방 증발해 버릴지도 모른다. 진짜 무서운 건 엄마아빠가 점차 나이를 들고 있다는 것, 시간이 걷잡을 수 없이 흐르고 있다는 것일 테니. 차라리 귀신이면 양반이려나? 그래도 귀신은 너무 싫다. 이 글을 쓰는 이 순간도 방탈출의 기억이 서서히 봉인해제 되려 한다. 아무래도 집에 있는 굵은소금이라도 좀 쳐야지, 팍팍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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