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기에.
2006년 여름, 한 중학교의 체육 시간. 바삐 뛰어다니는 아이들 사이로 뿌옇게 올라오는 흙먼지와 열기가 그득하다. 재미로 시작했던 피구는 혈기 넘치는 아이들로 인해 어느새 진지한 스포츠가 되고, 그 안에서 휘청이는 다리만큼 흔들리는 두 눈을 질끈 감은 내가 있다.
장면을 바꿔보자. 이번엔 2009년의 고등학교가 배경이다. 그 나잇대 애들이 그렇듯 잘 보이고 싶은 이성친구가 있었지만, 체육대회 여자부 씨름 시합에는 누구도 지원을 하지 않아 반장인 내가 울며 겨자 먹기로 경기장에 올랐다. 이기면 수치스럽고, 지면 머쓱해지는 이겨도 지는 게임. 결국 머쓱한 게 더 나았던 건지, 몇 번 힘을 주다가 그대로 경기장 코너로 밀려 주저앉고 말았다. 탄식하는 아이들 사이로 시선을 피하는 내가 있다.
이게 내가 운동에 대해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기억이다. 물론 좋은 기억들도 어딘가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 안 좋은 기억이 더 선명하게 남아있듯 운동에 대한 기억도 마찬가지다. 낙인처럼 내 인식 속 납작 자리를 튼 이 기억들 덕분에(!)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을 운동과 담을 쌓고 살아왔다. 움직이는 것 자체를 기피하는 것도 아니고, 운동이라 일컬어지는 일련의 행위를 안 하고 산 것도 아니었다. 벌레가 없는 겨울이면 엄마를 따라 고요한 산을 찬찬히 오르기도 했고, 태생이 급한 성격인지라 가뜩이나 빠른 걸음을 더욱 재촉하며 체중 감량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홈트’가 한창 유행일 때는 유튜브에 유명한 영상들을 집에서 따라 했고, 볼링이 대세일 때는 주변 지인들을 따라 공을 굴리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 다만 나에게 운동은 ‘잘해야 하는 것’, ‘잘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에 타인과 경쟁할만한 스포츠는 엄두도 내지 않았고, 누가 운동을 가자고 제안하면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요’라는 마인드로 거절을 이어왔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2023년 현재. 직장생활이 가져다준 매너리즘과 스트레스로 퇴사를 결심할 무렵, ‘더 이상 운동을 미룰 수 없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인이라면 기본 세팅된 뱃살과 액상과당 없이는 채 2시간도 가지 않는 집중력(슬프게도 나는 카페인에 극히 예민하기 때문에 주로 액상과당으로 에너지를 채웠다), 버석버석하고 허옇게 뜬 피부. 그리고 무엇보다 두 달에 한 번씩 pms와 함께 찾아오는 미칠듯한 우울감. 이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고도 해 봤고, 술이나 먹을 것으로 채워보려고도 해 봤고, 상담도 받아보고 심리학 공부로도 해결해보려 했지만 듣지 않았다. 이전과는 다르게 살아야 할 시점이었다. 한 개그맨의 유명한 드립처럼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변할 수 있다면 그게 변신 로봇 로보카 폴리지 사람이겠어요? 관성이라는 게 있고 더 근본적인 기질이라는 게 있는데 말이에요. 1n 년을 걸려 내게 도착한 결심답게 실천으로 옮기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들었다. 일단 ‘어떤 운동이든 하려면 기초 체력을 다져야 하니 헬스를 해야겠고, 한 번도 근력운동을 해본 적 없으니 자세를 다지려면 PT를 끊어야겠다’는 생각까진 했는데, 집 앞에 있는 헬스장에 가기까지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또 걸렸다. 동네방네 이야기해 둔 게 창피해서라도 이제는 가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날, 처음 방문한 곳이자 내 유일한 옵션이었던 동네 헬스장에 10회 PT를 끊었다. 겁에 질려 간 것치곤 심플한 결론이었다. 식이 조절은 따로 안 하고, 체중 조절보다는 근력 및 지구력 향상에 초점을 맞춰 설계된 수업을 주 2회씩 하는 것. 앞으로 이야기하겠지만 관장님은 요즘 유행하는 바디 프로필은 뒷전이고, 자신 말고 다른 헬스 트레이너가 수업하는 건 절대 신뢰하지 못하는 찐 헬스 애정러이기 때문에 부차적인 것들에 대한 잔소리(!)는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운동, 과연 오래갈 수 있을까?
Back in the days 1.
쇼핑으로 우울감 해소하기
별 다섯 개 만점에 두 개, “기쁨은 잠깐이지만 카드 빚은 오래도 가네”
장점: 돈 쓸 곳이 지천에 널려있는 자본주의 사회라 언제 어디서나 즉각적인 만족 가능. 돈을 쓰는 만큼 대접받을 수 있어서 ‘내가 사람 구실은 하면서 살고 있구나’하는 착각이 든다.
단점: 휘발성이 강함. 카드를 긁고 밖에 있는 순간에는 기분이 좋지만, 집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순간 짐이 된다. 쓴 돈을 벌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