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노력일지라도.
몇 년 뒤면 지구가 멸망한다는 이야기. 연도만 바뀌지 매번 들어왔던 이야기다. 다만 2012년에 지구가 멸망한다고 했던 이들이 예언가였다면 2040년 혹은 2050년 멸망을 주창하는 이들은 기후학자, 즉 과학자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관련 글이 올라올 때마다 댓글을 확인하면 '어쩔 수 없네' 혹은 '그래, 차라리 잘됐다. 다 같이 한 번에 죽자' 같은 이야기가 다수다. 지난한 기후 위기를 온몸으로 겪어낼 바엔 인류 멸망 같은 시나리오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걸까.
지구 멸망이 '엥, 이게 무슨 영화에나 나올법한 쌩뚱맞은 이야기야?' 같은 반응이 아닌 '그럴 만도..'라는 반응을 끌어내는 건 우리 모두 수긍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편의'나 '효율성' 같은 개념을 중요시 여긴 이래 지구는 감당 가능한 수준 이상의 자원을 착취당해 왔고, 필요나 생존이 아닌 쾌락과 욕구 충족을 위해 자원이 과도하게 남발된 사례는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걷지 않고 자동차를 타고, 기차로 이동하고 비행기로 여행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발생한 매연과 유해 물질들은 이제 우리들의 숨을 옥죄는 도구가 되었다. 식재료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이 정말 동물성 단백질을 필요로 하는 유기체인지 학자마다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만, 필요를 훌쩍 넘어선 육류 소비로 인해 동물들은 물론 식물, 토양까지 말라 죽고 있는 게 현실 아닌가. 잠깐의 쾌락을 위해 미뤄진 대가였을 뿐, 그 빚을 갚을 시간이 점차 우리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
사실이 이렇다면 우리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상적인 건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들을 하며 멸망 시기를 최대한 늦춰보는 것이다. 그 결심으로 수많은 국가가 RE100을 약속했고, 지구 온도 상승의 한계점을 설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권고에 그칠 뿐 각 국가의 알력 싸움과 자율권 침해 이슈로 인해 환경 보호를 강제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 틈을 타 대다수의 국가는 기존 방식 그대로 산업을 유지했고 지구를 위해 함께하자던 약속은 한낱 종잇장으로 효력을 잃었다. 사실 '지구를 위해' 함께하자던 약속은 '우리 모두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지만, 각 국가의 주요 산업을 좌지우지하는 기득권들에겐 당장의 이익 창출을 포기할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었다. 정말 그들만을 위한 다른 행성으로의 도피를 준비하거나 지하 벙커를 만들어놨는지 알 게 뭐야.
윗선에서 꼬이기 시작하니 대중들도 따를 리 만무하다. 아무리 재활용을 열심히 해봐야 미국에서 하루에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의 양은 웬만한 강 하나를 뒤덮을만한 규모고, 채식을 한다 해도 유튜버들이나 연예인들이 나와 광고하는 메뉴들은 하나같이 육류 위주의 메뉴들인데. 이래서 내가 채식 한 끼 하는 게 도움이나 되겠어?라는 생각이 절로 드니 우리의 종착점이 되는 건 염세주의다. 그래, 그럴 거면 그냥 다 같이 죽자. 어차피 해도 안될 거 노력은 왜 해? 남들도 육류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데 내가 왜 굳이 채식을 해야 하나, 티도 안 날 거. 남들도 안 쓴 물건 함부로 버리는데 내가 왜 아껴 써야 하나, 어차피 이 물건들의 산에 묻혀 죽게 될 거.
현실적으로 볼 때 염세주의는 언뜻 합리적인 선택처럼 보이기도 한다. 말한 대로 내 눈앞에 펼쳐진 현실에서 그 누구도 협조하지 않고, 오히려 멸망을 부추기는 일들만 하고 있는데 나만 하면 손해지. 하지만 염세주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아니다. 어떤 현상에 대해 보일 수 있는 태도의 일종일 뿐. 태도로 그치지 않고 '해결'을 해보자 마음을 먹었다면 우리는 염세주의를 뛰어넘는 액션을 제시해야 한단 얘기다. 그리고 이건 내가 사는 환경에 대한, 미래 세대를 위한 자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의 삶에 대한 통제력과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안 바꾸면? 누군가 알아서 바꿔주기를 바라야 하나? 내 삶인데? 내 미래인데? 남들이 육류를 먹는 건 내가 채식을 해서 내 건강과 미래를 지키는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고, 내가 물건을 아껴 써서 얻는 효능감과 만족은 남들과 비교할 이유가 없는 나만의 만족이다. 결국 지구를 위해 채식을 선택하는 일은 전 지구적 차원의 노력이기도 하지만 가장 개인적인 일이기도 하다.
지구 멸망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흔히 '지구촌 조별 과제 실패다'라는 식의 비유를 하곤 한다. 60억 인구가 모두 같이 해결해야 하는 조별 과제가 F등급 혹은 지구가 줄 수 있는 최악의 점수인 멸망으로 향하고 있을지라도 그 안의 누군가가 '이렇게 되선 안 될 일이지!'하고 키를 바로 잡는다면 나머지 사람들에게 어떤 변화를 줄지 모르는 일이다. 뻔뻔하게 무임승차를 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엉망진창으로 남에게 떠넘기기만 하는 사람도 있겠지. 그렇다고 내게 주어진 과제를 포기해야 하나. 설령 내 목숨을 위협한대도? 그건 아니지 않나요, 이렇게 죽고 싶진 않잖아요 다들. 전문가들이 경고한 마지노선을 아슬하게 넘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다. 화르르 타는 집 앞에서 '저기서 뭘 어째'하며 팔짱 끼는 사람보단 조그만 생수병이라도 던져주는 사람이 될 수 있길.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노력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