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는 나야 둘이 될 순 없어
언니와 나는 참으로 사이좋게 각각 아빠, 엄마를 닮았다. 언니는 아빠의 외모를 유난히 쏙 닮았는데 이런 얘기가 나오면 엄마가 으레 껏 꺼내는 레퍼토리 중의 하나가 이거다. 예전에 아빠랑 같이 일하는 직원이 우리 집에 올 일이 있었는데, 벨을 누르자 나온 언니의 얼굴을 보자마자 ‘아, 이 집이 사장님 집이구나’했다는 얘기다. 그 정도로 언니는 아빠를 쏙 빼닮았다. 반면 나는 엄마의 외양은 그다지 닮지 않았다. 그러나 뼛속부터 엄마 딸이라는 걸 느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내 성격이 엄마를 빼다 박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다혈질이다. 엄마가 40대 때만 해도 정말 매 순간이 타오르는 불 같았다. 엄마를 닮은 나도 중학생의 혈기로 결코 지지 않았다. 그때는 엄마와 내가 싸우냐, 안 싸우냐의 여부로 매일의 집안 분위기가 결정되었다. 화가 나도 웬만한 것이라면 혼자 슴슴히 푸는 언니와 아빠는 그때 굉장히 괴로웠을 것이다. 일단 엄마랑 나는 열받기 시작하면 목에 핏대 먼저 세우고, 상대를 가릴 것 없이 할퀴고 상처 내고 짓누르고 비꼬아야 1차가 끝난다. 2차는 그 울분을 참지 못해 혼자 화를 표현하는 것인데 엄마는 설거지거리를 부시듯이 씻어내며 혼잣말을 했고, 나는 한창 심할 때 벽에 주먹질을 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보면 분노조절장애 아닌가 싶지만, 지금은 둘 다 대체로 평온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성격이 정말 정말 급하다. 엄마를 빼다 박은 나? 매우 급하다. 이 세상이 우리의 템포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게 희한하게 생각될 정도다. 예를 들어 관공서에 서류 제출할 일이 있다면 그 진행상황을 한 시간마다 확인해야 한다. 월급이 들어오는 날도 폰뱅킹 알람을 설정해 놨음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어플이 닳도록 드나든다. 더 악수(!)인 건 어떤 일을 했다, 하면 그 결과가 바로 눈에 보여야 한다는 점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약불로 은근히 끓여야 할 것을 답답하다고 센 불로 끓이다가 와장창 넘치고 남는 것은 하나도 없이 허망해지는 그런 거, 그게 바로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엄마는 이제 60대에 접어들면서 본인 스스로도 그게 피곤하다는 것을 깨닫고 여유가 생겨 그런지 많이 덜해졌지만 나는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다. 이번주도 기껏 3 일한 운동으로 살이 빠지지 않는다고 괴로워했던 사람, 그게 바로 나다.
가장 큰 요소 두 가지만 간단히 설명했지만 그 외에도 엄마랑 나는 가치관도 이상향도 매우 비슷하다. 둘 다 지독한 현실주의자이면서 한편으로는 몽상가이며 실용주의자면서 허세 부리기를 좋아한다. (매우 모순이어 보이지만 인간은 다 모순적인 부분이 있지 않은가? 구체적인 포인트는 엄마와 나만이 공감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둘은 대체로 서로의 행동이나 생각을 대강 예상하고 유추해 낼 수가 있다. 지난 30년간 쌓인 빅데이터는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어떨 때는 내가 나 스스로에게 굉장히 싫어하는 부분들을 엄마로 비추어보며 지독한 환멸에 휩싸일 때도 있지만, ‘나는 절대로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다짐하게 될 때도 있지만 엄마의 일부가 내 안에 살아있다는 그 어떤 기묘한 안도감은 떨어져 있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게 한다.
매일 본인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도플갱어를 실제로 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흔히 영화에서는 도플갱어를 마주치면 사망한다고 되어있던데, 우리 집에 사는 나의 도플갱어는 마주칠 때마다 그냥 웃기고 재밌고 가끔 성질이 난다(?) 아직까지 둘이 치고받고 왱왱거리다가 낄낄 웃다 보면 하루가 다 가는 게, 그냥 천생연분이 아닌가 싶기도(…) 어느 정도 가치관이 확립된 나이라지만 나는 엄마의 모습 속에서 나의 미래를 가끔씩 마주한다. 그건 전혀 좋고 싫음으로 나뉠 성질의 것은 아니다. 그저 도플갱어처럼 그냥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지. 아마 커가는 나를 볼 때 엄마가 한 생각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일상의 한 장면
n년 전
엄마: 너 그렇게 얘기하는 거 진짜 고쳐야 돼. 그렇게 얘기하면 네 얘기 들으려고 하던 사람들도 안 들어 ~ (어쩌구저쩌구)
나: (먼산)
현재
나: 좀 그런 식으로 얘기 좀 하지마, 그렇게 얘기하면 누가 엄마 얘기 들으려 하겠어? 맨날 그렇게 하니까 ~ (왱알왱알 잔소리 중)
엄마: (먼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