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riter Lucy Nov 15. 2023

4화. 어버이날이 어버이날이 아니라서 미안해

엄마아빠의 자식으로 산다는 것.

어제 집에 와서 엄마랑 회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다 이유 모를 분풀이식의 다그침을 했다. 내가 해답을 모르는데, 엄마가 그걸 쉽게 풀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는지 아니면 요즘 출퇴근길에 보는 하우스 오브 카드에 나오는 주인공에 이입해 나도 그런 전략가 흉내를 내고 싶었는지. 둘 중 어떤 것이었든 간에 그건 엄마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엄마의 자존심이 상했는지 감정이 상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만약 엄마가 나와 정말 닮은 성격을 갖고 있다면 나는 그게 전자일 거라 예상한다.


그런 상황에서 어버이날을 맞는 건 상당히 어색하고 민망한 일이었다. 일어나 보니 열두 시 반이었고, 밥 먹는 내내 엄마랑은 대화가 거의 없었다. 게다가 미세먼지마저 어제에 이어 최최최최최악이라 어딜 나가자고 조심스레 손을 내밀기도 애매했다. 결국 어중이떠중이 각자 방에서 나는 유튜브만 하염없이 보고 엄마는 컴퓨터를 하다가 네시쯤에 내가 미리 예약해 둔 오리구이 픽업을 핑계로 먼저 나왔다. 가기 전에 어디든 들려서 꽃은 아니더라도 엄마를 기쁘게 해 줄 무언가를 찾고 싶었다. 그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사실 나는 그전에 유튜브 영상 몇 개를 보다가 연예인이나 유명인들이 사는 집을 보고 약간 기가 죽은 상태였다. 다른 애들은 틱톡이든 뭐든 어떤 방법으로든 벌써 억만장자 되어서 엄마아빠한테 차도 사주고 집도 사주고 가게도 내준다는데, 나는 대체 이게 뭐지. 선물을 보겠다고 기껏해야 간 곳이 쇼핑몰이었고 그 안에서는 엄마아빠가 좋아할 만한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등산복 브랜드에 들어가서 하릴없이 기능성의류나 뒤적이다가 그것도 아닌 것 같아서 팽. 옷을 사주자니 좋아하는 스타일을 딱 집어 사기도 애매하고 괜히 마네킹에 걸린 것도 후줄근해 보이니 땡. 차라리 말했던 것처럼 백화점 상품권을 사줄까 했는데, 카드 결제는 되어도 할부는 안된다네. 맘 같아서는 인당 오십만 원씩은 해주고 싶은데 할부가 안된다면.. 이번달 월급은 고스란히 다 날아갈 것 같아서 망설이기. 나도 뭐 하나라도 제대로 해주고 싶은데, 번쩍번쩍한 차는 아니더라도 입 떡 벌어지는 집이 아니더라도 뭐 하나라도 ‘받았다’ 느낌 나는 것 해주는 게 왜 이리도 어려운지.


결국 아무것도 못 사고 그냥 혼자 먹을 도너츠나 사서 우물거리는 채로 나왔다. 어버이날이라고 부모부터 자식들까지 줄줄이 딸려 나온 가족 외식으로 미칠 듯이 붐비는 오리구이집에 전투적으로 들어가서 전투적으로 나왔는데, 희한하게 집에 오는 길에 엄마랑 맥주를 한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막무가내로 집 근처 슈퍼에 돌진하듯이 들어가 맥주 한 캔과 너구리 5 번들 팩을 하나 사서 아무렇지 않은 척 집에 들어갔다.


오리구이는 생각했던 것보다 뭔가 그럴듯했다. 가마에서 나온 토기 자체를 박스에 담아줘서 박스에서 토기를 꺼내는데 아직도 열이 그대로라 뜨거웠다. 토기에서 꺼낸 오리는 은박지를 벗기자 또 면포에 싸여있었고, 그걸 벗기자 갈색빛으로 잘 익은 오리가 안에 견과류와 밤, 대추, 고구마 등과 찹쌀을 품은 채 잘 익어있었다. 기름이 쫙 빠진 덕에 좀 퍽퍽하게도 느껴졌지만 엄마고 나중에 혼자 소주와 오리를 곁들여 먹은 아빠고 둘 다 참 잘 먹더라. 뿌듯했네.


엄마랑 너구리 두봉을 끓이고 오리구이집에서 받은 반찬을 깔아놓고 오리 반마리를 분해해서 맥주 한잔씩 따라 같이 먹었다. 거절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던 엄마는 맥주를 나보다 빨리 마셨다. 처음엔 그냥 신변잡기로 오늘 공기가 안 좋다, 오리구이 집에 사람이 정말 많았다로 떠돌던 이야기가 오리가 반쯤 없어지자 조금 자리를 찾았다. 엄마는 술 얘기를 하며 친척들이 술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얘기도 했고, 아빠가 막내이모 집들이 때 나이트클럽 가자고 해서 외할아버지가 그 꼴을 보고 질색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나는 대부분 “진짜?”,”아, 너무 웃기다”라는 얘기만 하고 엄마의 얘기를 잠자코 들었다. 그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들이지만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좋았다. 엄마는 본인이 술에 너무 약하다고 투덜거렸지만 그 모습마저 좋아 보였다. 왜 오늘따라 안 마시던 술을 그렇게 사고 싶었는지 정확히 이유는 모르겠지만 참 잘한 일이었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주문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아빠가 퇴근했다. 어버이날인데 좀 일찍 퇴근하면 안 되냐고 투덜거렸던 엄마도 아빠를 반갑게 맞았다. 아빠는 오리구이를 보고 소주를 한잔 해야겠다고 했고, 나는 베란다에 있던 소주 한 명을 엄마에게 토스하고 거실에 자리를 잡고 앉아 드라마를 봤다. 아빠가 식사를 하는 동안 엄마는 언니와 잠깐 통화하며 오리구이가 어땠는지, 아빠는 지금 식사를 어떻게 하는중인지 얘기했고 내일 언니가 만삭 사진을 찍으러 가는 것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아빠가 식사를 마쳐갈 즈음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왔다. 조각 별로 맛이 나눠져 있어서 각자 맘에 드는 한 개씩을 픽하기로 했고, 엄마는 치즈케이크, 아빠는 슈팅스타, 나는 쿠키앤크림을 들고 티비 앞에 앉아 드라마를 봤다. 새로 시작한 드라마라 다소 난잡하고 엉성한 연출에 나는 한 마디씩 더했고 엄마도 아빠도 그에 반응하며 다소 건성으로 드라마를 봤다. 그러던 중 광고 타임이 됐는데, 아빠가 갑자기 소리를 줄여달라고 했다. 사실 그 몇 분 전에 나는 아빠가 흰 봉투를 찾는다는 걸 알았고, 아빠 방에서 그 안에 돈을 넣고 거실로 가져왔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좀 궁금하던 상태였다. 어버이날인데 나한테 용돈을 줄리는 없을 것 같고, 엄마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근데 아빠는 나한테 용돈을 줬다, 잘 커줘서 고맙다고. 본인이 라디오에선가 들었는데 어버이날은 원래 자식이 부모한테 감사함을 표현해야 한다고 알고 있지만 그게 아니고 잘 커준 자식에게 부모가 고마움을 표현하는 날이라고. 그래서 준비한 거고 너로 인해 엄마아빠도 많이 컸다, 잘 커줘서 고맙다고 아빠는 말했다. 30년을 가까이 살았지만 아빠한테 그런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조금 눈물이 나려고 해서 괜히 더 크게 웃었고 엄마는 왜 그러냐고 눈을 흘겼다. 엄마는 아직도 모른다, 내가 민망하거나 멋쩍으면 더 과장스럽게 반응하는걸. 아빠가 어떤 마음으로 그걸 준비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순간 이걸 받을 자격이 있는지도 잠깐 고민됐었다. 그래도.. 말썽 피운 것 없이 잘 컸으니까. 고맙다고 하면서 돈을 받아 인스타그램에 자랑도 하고 봉투에 아빠가 한 얘기도 구구절절 적었다. 이 돈은 진짜 의미 있는 곳에 쓰고 싶다고도 썼다.


나는 오늘 차 안에서 운전을 하면서도 그 생각을 했다. 나는 정말 엄마아빠 딸로 태어날 운명이 아니었던 거 아닐까. 프레스코화를 얘기하는 내 앞에서 “아휴, 어려운 말하네”라고 이야기하는 엄마가 정말 나랑 어울리는 걸까. 근데 그건 정말 웃기지도 않은 자만이고 허영이고, 어리석음이다. 어떻게 한낱 자식이 부모와 본인이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를 판단한다는 말인가. 싸가지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경우 아닌가.


엄마 아빠는 만난 지 세 번 만에 결혼을 약속했다. 아니 약속해야 되는 상황이었다고 하는 게 맞을 거다. 외할머니와 할머니의 이상한 우연으로 엄마 아빠는 선을 보게 됐고, 88년에 부부의 연을 맺어 언니를 낳고 나를 낳았다. 만약 둘이 결혼하지 않았다면 엄마는 지금의 나처럼은 아니더라도 본인 커리어에 더 욕심낼 수 있었을 거다. 아빠는 아빠 자신을 너무 힘들게 했던 그 방황의 끝을 찾을 수 있었을 터다. 


친구들의 권유로 일본 여행에 가기 전까지 엄마아빠는 해외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다. 나는 내가 번돈이니까 내 맘대로 써야겠다면서 프랑스에 가서 에펠탑도 보고, 바티칸에 가서 프레스코화도 보고, 스위스에 가서 나중에 내가 나이 먹었을 때 어떻게 살아야지 생각도 했다. 그중엔 엄마 아빠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엄마아빠에게 지금 나는 프레스코화가 뭔지 알 것을 종용한다. 그걸 모르는 엄마아빠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시 생각해도 기가 차는 일이고, 쪽팔리고 내가 너무 한심해서 누구한테 이야기하기도 민망하다.


그런 나에게 아빠는 잘 커줘서 고맙다고 했다. 나는 죄책감이나 미안함보다 그런 아빠가 내 아빠라서 너무 고맙다는 생각을 첫 번째로 했다. 이건 정말이지 내가 이기적이고 철없는 어린애라는 방증이자 솔직한 내 심정이다. 그런 말을 해준 아빠가 고맙고, 그런 부모가 되어줘서 고맙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줘서 고맙다. 엄마아빠한테 별다른 용돈도 따로 안 주면서, 기껏 오리구이 하나 사주고 디저트라고 지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케이크 사고 가성비 너무 쩌는 어버이날 아닌가..라고 생각한 딸의 이 철없음을 눈감아줘서도 고맙다. 엄마아빠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이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맨날 무슨 기념일이라고 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 생색낼만한 것들 들이대면서 상대방 불편하게 만드는 그런 날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해주려면 나도 정말 차나 집 같은 거 해주고 싶어 엄마아빠…


서른 살의 어버이날은 이렇게 간다. 내년부터는 꽁꽁이가 와서 어버이날의 효도를 제대로 해주겠지. 이렇게 말하면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조카한테 짐 지우는 것 같지만 사실 손자손녀라는 건 존재하기만 해도 할아버지할머니를 행복하게 해 준다. 언니가 힘들어서 그렇지……….. 휴 중간에 낀 이모는 뭘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내년에는 부디 집이나 차가 아니더라도 엄마아빠 맘 편하게 해 줄 그 무언가는 제발 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는 정말 더 잘 커서,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고 엄마아빠가 좀 방생(?)할 수 있는 그런 딸이길. 


*해당 글은 2021년 어버이날의 일기를 옮겨 적은 것이다. 2023년 현재, 나는 엄마아빠가 불안해하지 않고 방생할 수 있는 그런 딸이 된 걸까. 아직 잘 모르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