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을 회고합니다.
2022. 05. 03
4월은 지난 3개월을 돌아보기 적당한 타이밍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고민의 심해 속에 떠다니는 부유물 같은 3개월이었다.
귀엽고 알찼던 1월의 갓생을 지나, 갈피를 못 잡던 2월.
3월은 새로운 감정에 빠져 희희낙락 거리면서도 문득 실비나 제롬(사물들-조르주 페렉) 같은 인생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뭉게뭉게 피었더랬다.
4월의 나는 한 차례 허물을 벗은 것 같다.
어디선가 보았던 게시글에서 가재는 반복적이고 빠른 탈피를 통해서 성장하며 매번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고 했다.
이를 테면 경이로운 색상의 변화라던가, 집게가 무럭무럭 자란다던가 하는.
하지만 외부의 자극 없이 무사히 탈피한다는 가정 하에 수명을 이어나간다는 것,
탈피하고 난 직후 가장 약하고 죽기 쉽다는 전제가 달린다.
가재의 험난한 탈피 과정과 아물어가는 과정이 지난 나의 3개월이라면
성가시고 쓸모없는 상념 하나 정도는 뎅강 썰어버릴 수 있는 집게를 탑재한 4월은
나의 탈피 과정에 종지부를 찍은 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원하는 것에 대해 정립,
장기적인 관점에서 내가 바라는 것에 대한 정립.
바라지만 이룰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정리.
포기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정리.
(정립과 정리. 두 언어의 다른 개념이 확연히 느껴지는 부분이다.)
깊은 생각에 빠진 시간보다는 4월의 소소한 이벤트들이 내 집게를 벌크업 하는 데에 조력이 되었다.
미뤄왔던 라라산의 정복, 인생에 남을 꽤 사랑스러운 시간.
만 서른의 프로필 남기기
두 번의 전시 관람
사랑하는 동생, 친구, 그들과의 데이트
문득, 의문점이 생겼다.
단단해진 마음, 견고하게 쌓아낸 라이프에 윤곽선을 그어 선명해진 것이 맞는 걸까.
그러니까, 내가 이 삶과 나의 세계를 무관심하게 관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
이방인의 태도.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으며, 주인공 뫼르소에게 처음으로 동질감을 느꼈던 부분이 있다.
저녁에 마리가 찾아와서, 자기와 결혼할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마리가 원한다면 우리가 결혼할 수도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이미 한 번 말했던 것처럼,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마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왜 나하고 결혼을 해?" 마리가 말했다. 나는,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지만 그녀가 원한다면 우리는 결혼할 수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게다가 결혼을 원하는 쪽은 그녀고, 나는 그저 그러자고 했을 뿐이었다. 그러자 마리는, 결혼이란 중대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나는 "아냐." 하고 대답했다. 그녀는 한동안 잠자코 있다가 말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말했다. 그녀는 다만, 자기와 같은 식으로 사귀게 된 어떤 다른 여자가 똑같은 제안을 했어도 내가 받아들였을지 알고 싶어 했다. 나는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마리는 자기가 나를 사랑하는지 어떤지를 자문해 보는 것이었다. 나는 그 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잠시 또 잠자코 있다가 그녀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아마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겠지만 언젠가는 바로 그 이유들 때문에 내가 싫어질지도 모르겠다고 중얼거렸다.
'이방인-알베르 카뮈'에서 뫼르소는 살인 이후 재판, 옥중에서의 자신의 시간들까지 무심하고 '적게 말하는' 사람이지만
그런 그마저도 본인의 '죽음' 앞에서는 지나온 삶, 현재 마주한 시간, 본인 자신을 선명하게 인식하고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게 된다.
나는 나의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머나먼 죽음이라는 착각 앞에서 하루 단위의 걱정을 하는 데에 지쳐 정다운 무관심으로 일관하게 된 것인지,
죽음과는 별개로 밀도 높은 하루, 일주일, 한 달에 대한 정열적인 태도로 일정 수준의 관성을 갖추게 된 건지
아직은 알 수 없다.
5월을 잘 살아낸다면 답을 찾을 수 있겠다.
그래서 꽤 유난스럽게 살아볼 예정이다.
죽음에는 영 감이 없는 사형수의 마음 가짐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