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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마스테 Aug 01. 2020

 드라마스쿨 공연

드라마 스쿨



아이들과 나의 뉴질랜드 생활도 어느덧 일 년이 다 되어갈 즈음이다.  한국이라면 각각 초등학교 2, 3학년인 아이들이 그동안 다녔던 연기학원 (Darma School)에서 뮤지컬 공연을 하는 날이었다. 리허설 시간, 오전 9시 30분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동동거렸다.  공연 시간은 오전 10시 40분.  'Storyland'라는 제목의 공연이었다.  전래동요(Nursery rhyme)에 나오는 캐릭터들이 나와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새롭게 만들어 보자는 내용은 참 신선했다. 긴장하는 마음으로 리플릿을 받고 공연 전 자리에 착석했다. 공연이 시작되자 나는 너무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어설픈 공연, 요란한 객석


캐릭터는 잭과 콩나무, Humpty Dumpty, 늑대 등 다양했다.  무대 자체는 좋았지만 음향, 조명, 아이들의 연기가 너무 형편없었다. 제대로 말을 못 하는 아이도 있었고 소리가 작아서 잘 들리지도 않았다. 어떤 아이는 제대로 된 대사를 하지도 못하고 그냥 서 있기만 했다.  빨간 모자 역할인 딸아이가 나오는 순간이었다. 대사는 잘 외워서 했지만 실력은 역시 실망스러웠다. Jack be Nimble이라는 역할이 주어진 아들도 우왕좌왕했다. 내 눈에 순서는 엉망이었고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의 호흡도 제각각이었다. 무슨 노래인지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내가 들였던 시간, 돈, 노력에 대한 회의감마저 들었다. 아이들의 자신감 향상을 약속했던 연기지도 선생님과 원장님께 속상한 마음까지 들었다. 이렇게 엉망인 공연이라는 것도 놀라웠지만 더 놀라운 것이 있었다. 바로 공연을 지켜보는 학부모들의 태도였다.  이 자리에 모인 학부모 중에서 실망감을 느끼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인 것 같았다. 자신의 아이들이 나오는 장면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의 노래와 연기에 진지하게 경청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오신 가족도 있었다. 약 30분의 공연이 끝나자 커튼콜(Curtain call)이 이어졌다. 깜짝 놀란 것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성이 끊이질 않았다. 내 뒤에 있던 학부모들은 요란하게 휘파람을 불어댔다. 몇몇 학부모는 대사 한마디 하지 못한 자신의 아이들에게 너무 훌륭했다면서 커다란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곧이어 2부 공연이 시작이 되었다. 4년 이상 연기를 배웠다는 고등학생들의 무대가 이어졌다. 이제 조금 제대로 된 공연을 볼 수 있겠지 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의상은 조금 더 화려했고 긴 호흡의 대사는 막힘이 없었다. 하지만  키가 훌쩍 큰 아이들이 대사를 하면서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만지작거렸다.  한 명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사를 하거나 듣기 힘든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무대 위 다른 아이들은 어쩔 줄 몰라 로봇처럼 어색하게 서 있기만 했다. 하지만 내 눈에 보기에 4년 이상 배웠다는 아이들의 무대는 실망 그 자체였다.  





© mauriciokell, 출처 Pixabay


공연이 끝나고


1부, 2부 공연이 끝났다.  아이들이 옷을 갈아입고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최고의 무대를 바랐다. 아이들이 공연을 잘할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노래도 딱딱 정확하게 맞춰서 해야 했다. 아이들이 어디에 설지 몰라 서성거리는 것은 남과 비교될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다.  학예회는 무엇보다 성취가 중요했다.  아이들이 한국에 다녔던 초등학교 1학년, 2학년의 학예회가 생각났다. 큰 강당에 화려한 의상, 구성이 아주 잘 짜인 학년별 공연, 수준 높은 음향 그리고 기대 이상의 학예회였다. 짧은 시간 동안 준비했음에도 대부분 학부모들은 만족했다.  하지만 자신의 아이들이 무대에 나오는 순간이 아니면 진지하게 경청하지 않았다.


공연이 끝나고 아이들과 함께 집으로 오는 길. 운전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은 약 15분. 거기에 있었던 학부모들과 나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왜 나만 실망했을까. 서로 다른 평가의 기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여태 나는 누군가의 기대에 맞춰진 평가가 옳다고 믿었다. 남이 평가해 주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남이 좋다고 하면 좋은 것이고 잘했다고 하면 잘한 것이었다. 나의 여렸을 적 학예회도 연습시간이 아주 짧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즐기는 공연이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공연은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중고등학교 담임선생님은 학생들의 등수를 교실 뒤편 벽면에 붙여놓았다. 자연스레 등수로 나의 기준이 평가가 되었다. 남과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늘 뮤지컬 공연 좌석에 앉아있었던 대다수의 학부모들은 결과보다 과정을 소중하게 생각한 것이다. 내가 공연을 잘 하든 못하든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나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는 문화.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게 다른 점이었다.



아이들이 저녁을 먹으면서 공연에 대해서 한 마디씩 했다.  

"오늘 공연 정말 재미있었지?"

"응, 최고의 하루였어"

"너무 떨렸는데 그래도 다음에 또 하고 싶어"

'맞아. 너희들 오늘 아주 훌륭했어'라고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공연을 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뭘까 생각했다.

나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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