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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이 Jan 07. 2022

같은 월급인데 왜 나만 못 쉬고 나만 제일 늦게 끝나?

2회 말_나의 첫 부서는 최고 빌런

드디어 첫 부서로 출근하는 날, 아직도 그날의 모든 것이 생생하다. 일본에서는 일 년에 한 달 정도 소속이 다른 두 리그의 각 팀이 함께 시합을 하는 교류전을 진행하는데 보통 리그 중반인 6월에 열리곤 한다. 발령 부서로 처음 출근했던 그날은 교류전 저녁 시합(오후 6시 시작)이 있었던 날이었는데, 보통 저녁 시합이 있는 날에는 오후 1시에 출근하여 시합이 끝날 때까지 근무를 해서 아침에 정시출근 한 나는 텅텅 빈 사무실에서 시작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12 구단 최대 규모로 운영되던 구단 공식 매장

내가 첫 부서로 발령받은 곳은 흔히 굿즈라고 불리는 구단의 공식 머천다이즈 상품 판매를 관리하는 부서였다. 사람들 쉴 때가 가장 바쁜 업계의 특성상 휴일에 출근하고 평일에 쉬는 것은 다른 부서와 같았지만 담당하는 매장이 연중무휴이고 야구 시즌이 끝나면 5대 돔 투어라고 불리는 인기 아티스트의 콘서트가 매주 있어서 겨울에는 콘서트 굿즈의 위탁판매를 진행하기도 해 일반 회사에 비해 특이한 근무 사이클을 운영하는 회사 안에서도 유일무이한 곳이었다. 더욱이 직접 고객을 대하는 부서이다 보니 전화는 물론이고 시합 날 가끔 접하게 되는 대응하기 어려운 손님을 만나기라도 하면 체력은 물론이고 마음도 많이 지치는 곳이었다. 다른 부서는 정원이 정해져 있는 티켓처럼 판매총량이 정해져 있거나, 한 사람당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양이 어느 정도 정해진 것처럼 고객의 소비총량이 정해져 있지만 굿즈라는 물품은 재고가 있는 한 판매는 계속될 수 있고 시합 결과나 고객의 마음이 변하면 충분히 소비를 늘릴 수 있기 때문에 구단 입장에서는 노력하면 매출을 늘릴 수 있는 사업이기도 하다. 하지만 티켓과 음식과 같이 야구시합을 관람하는 데 있어 꼭 필요한 소비는 아니고 굿즈가 없어도 충분히 야구를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일반 소비자의 지갑을 열기란 매우 어려운 곳이기도 했다. 반대로 로열티 높은 고객의 지갑은 상대적으로 일반 소비자에 비해 쉽게 열리기도 했지만 그만큼 만족도를 충족시키기 위한 허들도 많이 높았다.


신입사원 부서 연수 중에 굿즈샵에서 일주일 정도 함께 일을 했던 적이 있어서 선배들이나 아르바이트 스태프들도 안면식은 있었고, 간단한 업무도 조금은 숙지하고 있었기에 처음에는 급한 불을 끄러 다니는, 예를 들면 재고보충이나 계산대에서 대기줄 정리, 아르바이트 스태프 출퇴근 관리 같은 일을 맡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보통 한 팀과 3일 연속으로 시합을 하는데, 정신없이 첫 3연전이 끝나고 나서야 제대로 된 부서 설명과 앞으로 하게 될 업무 등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현장에서 고객을 직접 대하는 부서다 보니 아르바이트 스태프들도 굉장히 많았는데 개인적으로는 비교적 나이 차이가 적게 나는 대학생들과 함께 북적이며 일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 무엇보다 야구를 좋아하는 스태프들이 대부분이라 야구를 잘 모르는 나에게 기본 룰이며 팀의 역사나 선수 정보, 지역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어서 업무외적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3연전이 홈에서 두 번 이어질 때는 6일을 꼬박 매일 같이 얼굴을 보며 함께 일하는 사이라 그런지 사이가 끈끈하고 한국과 다르게 일본은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프트제 문화가 있어서 대학교 4년 내내 알바를 하고 졸업하는 친구들도 많아 함께 졸업파티를 하는 모습을 보니 부럽기도 했고 참 좋아 보였다.


나보다 한 해 먼저 부서 배정을 받은 공채 선배가 이 부서에 왔을 때 아무것도 모르는 정사원이 십여 년을 일한 아르바이트 스태프 위에서 지시하는 것을 불편하게 느꼈던 몇몇 직원들의 이야기로 조직이 크게 흔들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과장님은 내가 배정받고 나서는 철저히 아르바이트 스태프와 같은 시선에서 일을 배우며 그들이 아는 것을 모두 흡수한 사원이 되어 사원과 알바라는 조직을 잇는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며 슈퍼 M짱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인생 첫 직장,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타지에서 외국인은 나 혼자. 철저하게 어웨이였던 그곳에서 말 그대로 살아남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텼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처음이자 유일한 외국인 그리고 한국인이라는 타이틀을 홀로 짊어지며 '외국인 혹은 한국인은 이래서 안돼'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쏟아냈다. 매일 상품이 입고되면 커다란 수레를 들고 가 박스를 옮겼고, 비어있는 진열대에는 수시로 물건을 채워 넣었다. 영업 전과 후에는 현금이 가득 찬 금고 차를 옮기며 어두컴컴한 돔의 통로를 지나다녔고 가끔은 알아들을 수 없는 사투리의 문의 전화도 받고 진 시합에 대한 화풀이 전화를 받아내기도 했다.


클레임도 많고 작업이 어려워 신입생들의 첫 번째 절망이던 유니폼 압착

정신없이 한 달이 지나 회사의 대목이라고 할 수 있는 팀의 가장 큰 이벤트 시즌이 있는 7월이 다가왔고,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급격히 늘어난 상품과 손님 그리고 매출의 규모를 보며 매일 자정이 넘어 퇴근하던 날들을 보냈다. 우리 구단에서는 매년 이벤트 시즌이 되면 그 해의 테마색을 활용한 유니폼을 관람객에게 무료로 나눠줬는데, 당시 부서에서는 그 유니폼에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의 등번호와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와펜의 매출을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대대적으로 홍보도 하고 무료로 압착을 해주는 부스도 크게 운영했다. 회사는 규모를 더욱 크게 운영하기를 원했지만 애석하게도 아르바이트 스태프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학생 시험기간에 겹치는 바람에 출근할 수 있는 인원이 평소 평일 시합 수준이었고 일일 알바를 구한다고 해도 숙련되지 않는 스태프들이라 고객 클레임이 많이 늘었던 전례가 있다고 하여 평소에는 전체적으로 매장을 관리하는 사원들도 직접 압착 부스에서 대응을 진행했다. 바다가 눈앞에 보이는 돔은 여름이면 습한 날씨가 배로 느껴졌고 열사병 위험도 있어서 평소에는 텐트를 치고 매장 지붕 밑에서 하던 압착 부스를 매장 아래의 주차장을 막아서 설치를 했었다. 실내이기는 하지만 에어컨도 없고 압착 기계에서 나오는 열기에 자동차 열기까지 더해져 선풍기에서는 뜨거운 바람이 계속 나오고 있었는데 정신없이 압착을 한 건 한 건 하던 나에게 시합 운영을 담당하는 부서의 동기가 구장 순회를 돌다가 인사를 했는데 내가 눈치채지도 못하고 그 친구 말로는 얼이 빠진 얼굴로 압착을 계속하고 있었다며 괜찮냐고 동기 라인에 연락을 줬다. 세상은 모두 휴가철인데 우리는 제일 바쁘고, 그나마 연전의 마지막인 일요일 낮 시합이 끝나고 오랜만에 만나서 한 잔 하자는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시합 종료와 상관없이 매장이 끝나는 시간까지 자리를 지켜야 했고 영업 종료와 동시에 정산도 해야 했기에 김 빠진 맥주처럼 한참 뒤에 합류하곤 했다.


나름 스포츠 비즈니스를 전공한 석사인데 현실은 매일이 땀범벅에 짐 옮기느라 멍도 많이 들고 점심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 듣기에만 그럴싸해 보이는 구단 직원이었다. 선수들의 멋진 플레이와 입이 떡 벌어지는 연봉은 팬들이 보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먼 이야기였다. 직원식당에서 밥 먹을 타이밍을 놓쳐 엄마가 보내준 밑반찬으로 도시락을 싸가면 악의는 없었겠지만 '어디서 냄새난다'는 목소리가 들려 눈치 보며 밥 먹는 것도 서러워 내가 왜 여기서 이 고생을 하고 있지? 하는 생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건, 연중무휴였던 매장을 관리해야 하는 입장이라 사원 중 누군가는 책임자로 출근을 해야 했는데 내가 배정받은 직후에 선배 2명이 마음의 병으로 휴직을 하게 되어 나를 포함한 3명의 직원이 돌아가면서 매일 매장을 관리해야 했다. 월요일은 이동일이라 시합이 없고 다들 쉬는 날인데 6연전을 치르고 월요일에 또 출근해야 하는 그 고통이란...! 그리고 하루 쉬고 하루 나가고 또 쉬는 징검다리 근무는 쉬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출근일 사이라 발생하는 업무들의 팔로업을 위해 전화를 받아야만 했다. 내일 또 나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업무가 머리에서 나가지 않는 것도 있었는데 당시 사회인 1년 차인 나에게는 가뜩이나 적응해야 할 새로운 것들이 가득했는데 천천히 받아서 소화시키기에는 손이 부족해 매일이 전쟁터에 나서는 훈련병의 느낌이었다. 머리로는 괜찮다며 눈앞의 적들을 하나하나 헤쳐나갔는데 내가 모르는 사이에 몸은 많이 힘들었는지 불을 켠 상태로 잠이 든 날도 많이 있었다. 본격적인 회사생활을 시작하면서 나 자신이 힘들게 적응을 했고 상황이 녹록지 않은 것도 있어 1년 뒤 신입사원 후배가 부서로 왔을 때나 신입사원의 멘토가 되어 적응을 도와줄 때 꼭 '제대로 쉼의 중요성'을 말해주고 싶었고 그들이 말하기 껄끄러운 부분은 내가 대신 소리를 내주기도 했다. 내가 겪은 어려움을 후배들이 겪지 않고 가능하면 최대한 지름길로 갔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기도 했고 그게 선배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가 아닌가 싶었다.


나의 첫 부서는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든 곳이었다. 하지만 야구장에서 유일하게 손님이 집으로 가져갈 수 있는 추억을 판매하는 곳이라 보람도 많이 느낀 부서이기도 했다. 나중에 부서 연수할 때 후배들에게 멋지게 포장하려고 오늘 돔에 온 추억을 가져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을 판매하는 곳이 아니기에 고객 스스로가 원해서 우리 매장으로 와주셨고 기꺼이 적지 않은 금액을 지불하면서 물건을 구매해주셨기에 감사했다. 한국에서 오신 분들을 만나면 가지 못하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에 하나라도 더 챙겨드리려고 했고, 잠깐 배운 적 있던 수화로 이야기하는 분을 만나 인사드리면 반가워해주셔서 내가 더 기뻤고, 어린 꼬마 손님에게 건네준 스티커가 울음을 그치게 해 줬을 때는 세상을 구한 히어로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기억들로 돔에서의 시간을 버텼던 것 같다.


시즌이 끝나면 평소에는 잘 못 들어가는 그라운드에서 스태프들과 야구를 즐기기도 했다.

최고 빌런 부서에서 울고 웃으며 시즌을 버텼고 그간 선배들이 엄두도 내지 못했던 아르바이트 스태프들과의 갈등을 풀어나가면서 나는 회사 내에서 커뮤니케이션 능력 좋은 일 잘하는 슈퍼 신입으로 소문이 났다. 물론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그동안 하려는 사람이 없었던 걸 어쩌다 내가 했을 뿐이다. 일이 유난히 힘들어서였을까 알게 모르게 생겨난 전우애는 끈끈했고 부서이동 후에도 스태프들과 가끔 돔에서 지나치면 항상 반갑게 인사해주셨고 귀국 전 동기가 만들어 준 영상에서도 인사를 남겨주셔서 참으로 감사했다. 소위 말하는 머리가 좋은 사람, 고학력일수록 업무를 정확하고 빠르게 이해할 수는 있을 테지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업무처럼 이해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한다. 결국 함께 일하는 건 사람이니까. 


그리고 이 부서에서 일하며 회사원으로 들을 수 있는 가장 기분 좋은 칭찬은 이게 아닐까 생각했다. 

바로 같이 일하고 싶은 사람. 


잠시나마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였기를,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한 존재로 있을 수 있기를 바라며 나의 첫 성장통을 기억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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