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초_일본에서도 동기사랑 나라사랑
내가 입사할 회사는 후쿠오카에 있었지만 설명회나 면접은 도쿄의 그룹 본사에서도 진행되었다. 사옥에 눈으로 봐도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많아서 입사할 때 내심 나 혼자 외국인은 아니겠구나 싶었었다. 하지만 입사가 결정되고 각종 절차로 회사 측과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우리 회사인 구단의 외국인 정사원은 내가 처음이고 유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입사동기는 현역 대학생인 일본인 세 명. 나는 한국에서 학부를 졸업하고 바로 일본의 대학원으로 진학을 하였는데 연구실 동기였던 일본인 두 명 모두 현역 대학생이었고,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휴학을 잘하지 않는 일본의 대학생들이라 휴학을 했던 나는 두 살 어린 친구들과 동기가 되었다. K-대학생활을 했던 나는 반말하는 어린 동기들이 살짝 어색했지만(꼰대 +1) 일본은 만 나이를 쓰기도 하고 나이가 어려지니 이득인 것 같아 어느새 나이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일본에서는 직접적으로 나이를 물어보는 일이 많지 않아서 느낄 일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런 나에게 새로운 입사동기들은 대학원에서의 시간이 더해진 네 살 어린 친구들이었다. 실제로 동기들보다는 선배들과의 나이 차이가 더 적기도 하고 내 주변에는 사회 초년생을 벗어난 친구들과 지인들이 많았기에 처음에는 나 스스로가 동기들에게 '난 너희와 달라' 라며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었던 것 같다. 출신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관심사도 다른 우리 신입사원 넷은 입사지원을 하게 된 동기도 가지각색이었는데 시간이 지나 신입사원 때 이야기를 하면 '그때는 너 진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라고 웃으며 농담할 수 있는 사이가 될 만큼 매우 친해졌다. 물론 나 혼자 만들었던 벽은 진작에 사라진 지 오래였다.
물론 처음에는 이렇게 친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인이자 네 살 많은 나, 한국 아이돌을 좋아해 혼자 서울에 가본 적 있던 J짱, 대학교에서 제 2외국어로 한국어를 배웠고 나보다 부산을 가본 적이 많던 S짱, 셋이 점심시간에 한국 이야기를 하면 '내가 모르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 줄래?' 라며 대놓고 이야기하던 N군. 이렇게 넷이 동기였기 때문이다. 나이 많은 한국인 동기 앞에서 한국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고 대놓고 이야기를 해서 처음에는 '이게 일본의 이지메인가?' 싶었는데, 연말에 NHK 홍백가합전이라는 거의 모든 일본 사람들이 보는 방송에서 트와이스를 보고 흠뻑 빠져서는 새해가 되자마자 한국어 알려달라며 다음 동기모임은 한국음식점이라고 하는 그를 보고 우리 셋은 단순히 커뮤니케이션 스킬이 부족했던 거라며 N군의 영원한 안주거리를 찾고야 말았다. 트와이스로 한국에 입덕한 N군은 나의 하드 트레이닝으로 삼겹살과 소맥의 맛을 알아버리고 시간이 지나 내가 귀국할 즈음엔 편지에 자신의 이름을 한글로 적을 수 있을 만큼 실력이 일취월장하여 내심 뿌듯했다. 한글 전파에 나도 조금은 일조를 했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처음에는 내가 졸업논문을 지도했던 후배들과 같은 나이의 동기들이라 함께 발을 맞춰 나아간다기보다는 내가 이끌어줘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했던 것 같다. 동기들도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나는 포커페이스 같은걸 잘 못하는 사람이다.) 신입사원 연수가 끝나고 각 부서로 배정되기 전 날, 1년 후의 자신과 동기들에게 편지를 쓰는 시간이 있었는데 다음 해에 함께 모여 읽어본 편지에 J짱이 나이 차이가 나서 의지할 수 없는 동기로 느끼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후쿠오카 사투리라면 언제든 알려주겠다며 도움이 필요할 때는 동기들에게 기대 달라고 적어주었다. 나중에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첫 부서에서 맘고생을 호되게 했던 당시에는 속 좁은 나보다 더 마음이 넓은 친구들이 고맙고 미안해서 눈물이 나오려던 걸 정말 꾹 참았던 기억이 있다.
신입사원 연수 중에 공채 선배들이나 인사부 선배들이 일을 하면 점점 더 동기가 소중하게 느껴지고 유일하게 마음을 허락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며 사이좋게 지내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위에 나온 것처럼 우리는 사이가 나쁘지도 않았지만 좋지도 않았다. 일본의 지역적인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고 나중에 술자리에서 이야기를 하기도 했는데 간토 출신에 도쿄에서 대학을 다녔던, 사실은 동문인 N군은 사투리 없는 표준어를 구사했는데 규슈지역에서 나고 자라 대학도 거기에서 다닌 J짱과 S짱에게는 조금 차갑게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래도 회사가 수도권이 아닌지라 지역 출신의 사원들이 많았는데 나도 5년간 일을 하며 일본어 억양이 약간 변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스포츠 팀은 전국적인 인기를 얻는다고 해도 물리적으로 구장에 올 수 있는 고객들은 그 지역 사람들이기에 한국보다 땅이 더 크고 지역별로 문화의 차이가 큰 일본에서는 그 차이가 더 클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연구실 동기이자 동종업계 종사자였던 M군의 팀은 그 지역 출신이 아니면 채용을 안 하기도 했다.
신입사원 연수기간 동안 한 명의 사회인으로, 그리고 후쿠오카 사람으로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져 가며 각자 고군분투를 이어갔다. 회사 전체 바비큐 행사 때는 신입사원은 무조건 빵 터지는 장기자랑을 해야 한다고 한 기수 위 선배들에게 듣고는 퇴근 후 정장을 입은 채로 동네 피자집에서 넷이 머리를 꽁꽁 싸매면서 자기소개를 준비하기도 했다. 당일 출근 전에 돔 앞에 있는 바닷가에서 연습까지 했는데 알고 보니 선배들이 장난으로 했던 말에 우리가 죽자고 달려든 거였다. 덕분에 회사에서 우리 넷의 이름과 출신까지 모두 기억해주셔서 흑역사로 남긴 했지만 보기 드문 넷의 파인플레이였다. 그렇게 이제야 넷이 맞아가나 싶었는데 시간은 흘러 드디어 우리도 각자의 부서로 흩어질 때가 왔다. 안타깝게도 우리 넷 모두 다른 부서였고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업무로 종종 만날 가능성이 큰 부서였는데 나만 사무실이 달라 살짝 울상이 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첫 부서는 당시 회사에서 가장 힘들다는, 아무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현장 중의 현장이었다. 누군가는 갈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설마 나일 줄이야! 한 명씩 새로운 명함과 함께 발령부서를 알려주셨는데 내 표정이 너무나도 복잡해서 부서 발령 전부터 잡아두었던 우리 넷의 출정식이었던 야끼토리 집에서 동기들은 부서 연수하면서 그곳의 좋았던 점을 이야기하며 위로해주었다. 다른 동기들도 현장 중심의 힘든 부서이긴 했지만 덕분에 연수기간 보다 더 커진 동기애와 함께 '한 달에 한 번은 꼭 동기모임 하기'가 꼬박꼬박 잘 지켜지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외부 연수에서 함께 배웠던 명함 교환으로 각자의 첫 명함을 동기들에게 나눠주고 각자의 부서와 이름이 적힌 명함을 받았다. 요즘은 사라졌다고 하는데 '라떼'에는 대학 1학년 때 동기주라는 걸 선배들이 만들어 동기들이 순서대로 나눠마시고는 했다. 그때 모두가 외치는 콜은 '동기사랑 나라사랑'. 동기를 나라와 같이 사랑하자라는 의미인 것 같은데, 요즘은 이런 술을 강요하는 콜은 대학가에서 없을 거고 메타버스 시대에 유효하지도 않을 것 같기도 하지만 함께 시작을 한다는 것 그리고 같은 위치에서 서로의 고충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안을 받고 큰 응원을 받는지 느꼈던 연수기간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퇴사와 귀국을 결정하니 슬퍼하기보다 한국에서 만날 수 있으니 더 좋다며 바로 졸업여행을 기획해주고, 감염자가 갑자기 늘어나 공항에 오지 말라고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기어이 손편지까지 준비해 내 눈물샘을 터트려 준 소중한 동기들과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생긴 시간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자유롭게 오가기 힘들지만
사랑하는 동기들과 돔이 그곳에 있는 한 나에게 후쿠오카는 다시 가야 할 곳이 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