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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이 Jan 18. 2022

야구 시즌 끝나면 할 일 없을 줄 알았지

3회 초_1년 내내 돌아가는 돔

호된 신고식과 같았던 첫 시즌에도 끝이 보이기 시작할 즈음, 리그 1위를 유지하고 있던 우리 팀은 쌀쌀한 바람과 함께 성적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본 프로야구(NPB) 리그는 2개의 리그로 나뉘어 정규시즌을 진행하고 그 이후에 일본시리즈라는 두 리그의 챔피언이 최고의 자리를 가리는 시스템으로 시즌을 진행하고 있는데 안정적이던 1위가 위태로워지더니 어느새 확실해 보였던 우승이 어려운 상황에 봉착한 것이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흥미진진한 패넌트 레이스가 더 재미있겠지만 우승이라는 목표를 향해 1년을 달려온 구단 직원들은 그 목표가 멀어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물론이고 우승이 결정 나지 않는 상황이 답답하기만 했다. 시즌 종료 직전까지 우승팀이 정해지지 않을수록 만약에 우승을 했을 때에 필요한 우승 굿즈를 비롯한 비루카케(ビールかけ)라 불리는 맥주 샤워로 우승을 축하하는 세리머니의 준비며 이후에 치르게 될 클라이맥스 시리즈라는 일본시리즈로 향하는 마지막 난관을 준비하는 시간이 매우 촉박해 지기 때문에 플레이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워 보게 된다.


그중에 준비시간을 가장 요하는 것은 역시 우승 굿즈라 불리는 리그 우승 기념상품들인데 디자인은 이미 여름 즈음에 완성되어 우승 기미가 보이기 시작하면 발주를 하게 된다. 결과를 보고 발주를 하면 최고로 매출을 올릴 수 있는 타이밍인 우승 직후에 판매할 수 없기에 어느 정도 예측을 해서 도박 아닌 도박을 하게 된다. 리그 내내 선두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우리 팀은 최근 몇 년간 리그뿐만 아니라 일본 챔피언 자리를 꿰차고 있던 자타공인 우승후보였기에 팀을 믿고 우리 부서는 우승 굿즈를 발주하게 되었다. 는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쥔 각본 없는 드라마였던 그 시즌은 지금은 세계적인 야구 스타가 된 오타니(大谷翔平) 선수에게 무릎을 꿇고야 말았고 뒤늦게 납품된 우승 굿즈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고 창고에서 즉시 전량 폐기처분이 되고야 말았다. 다른 리그의 챔피언은 거의 25년 만에 우승을 한 연구실 동기가 입사한 구단이었는데 우승을 밥 먹듯이 했던 우리 팀에 비해 우승 경험이 있던 직원들이 거의 없어 우승 굿즈는커녕 준비를 제대로 못 해서 꽤나 고생이었다며 즐거운 비명을 지르곤 했었다. 이렇게 나의 첫 시즌은 끝이 났다.


길고   시즌이 끝나고 드디어  잠잠해지나 싶었던 굿즈샵은 오히려 시합  보다  많은 업무와 스트레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시즌이 시작되면 항상 하던 루틴 업무만으로도 매장의 운영이 어떻게든 되지만 시즌이 끝나면 흔히 일본의 5 돔이라고 불리는  돔에서 유명한 아티스트들의 콘서트 투어가 시작되곤 한다. 우리 팀은 구장도 함께 소유하고 있어 회사 내에 콘서트 대응을 하는 부서가 별도로 있었는데 회사 소유의 돔에서 콘서트를 하는지라 부지 내에서 발생하는 판매부스를 비롯한 모든 이벤트 역시 우리 회사와의 협의가 필요했었다. 특히 굿즈라고 하는 카테고리는 회장별 한정 아이템도 많고 현장에 오지 않으면   없는 것이 많아서 콘서트 전부터 미리 굿즈 판매를 시작하곤 했는데 계약조건에 따라서는 우리 부서에서 일부를 위탁판매 형태로 진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반대로 발생한 쓰레기까지  수거해 가는 곳도 있었는데 이전에 팬들이 쓰레기도 찾아서 가져갔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콘서트가 있는 날에는 추운 겨울에도 많은 팬들이 모였던 돔

물론 한국 아티스트들의 공연도 매우 많았는데 안 그래도 회사 내에 많이 있던 케이팝 팬들은 내가 입사할 때부터 전사 메일로 공유된 자기소개서를 보고 연수 중부터 하나 둘 말을 걸어줬고 그들이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공연을 할 때면 손님으로 와서 두 손 가득 굿즈를 사가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코로나 19 사태로 일본도 전자결제를 많이 도입해서 이제는 꽤 달라지기는 했지만 당시만 해도 현금결제 밖에 하지 못 해 판매 중에 가득 찬 금고를 회수해서 입금하고 끝나고 한 번 더 입금할 만큼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돔 내부에 돔의 각 매장에서 발생한 매출을 입금하는 입금실이 따로 있었는데 기계에 입금이 가능한 금액을 넘어서 기계를 비우고 다시 입금했던 일도 비일비재했다. 나의 쥐꼬리 월급인 외화벌이와 차원이 다른 숫자에 내심 뿌듯하며 한국 아티스트들의 선전을 멀리서나마 응원하곤 했다.


내 자리는 없지만 반가운 멜로디와 함께 매주 콘서트가 있던 12월이 지나면 일본의 큰 명절인 연말연시 연휴가 있고 본격적으로 회사는 새 시즌 준비에 돌입하게 되는데, 사실 이때가 각 구단들은 가장 바쁜 시기이기도 하다. 시즌이 시작되면 가장 바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실제로 잔업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은 건 1월과 2월이 피크였다.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보통 2월에 각 팀의 스프링캠프라고 하는 원정 훈련을 진행하며 한 시즌의 정예 멤버와 개막 투수를 가리기 시작하고 3월에는 몸풀기 시합과 같은 오픈전(한국에서는 시범경기라고 부르는 것 같다.)을 진행하는데 6월의 교류전과 마찬가지로 소속 리그 관계없는 대진으로 진행된다. 그리고 예열을 마친 각 팀은 보통 3월 마지막 금요일 저녁에 길고 긴 경쟁의 시작을 맞게 된다. 다른 구단도 비슷한 것 같은데 내부적으로는 12월 중에 다음 해의 시합 일정을 알게 되기에 어느 정도 굵직한 이벤트나 프로모션 계획을 다 짜고, 지역행사나 전국적인 이벤트가 있다면 그런 상황들도 고려해 테마를 정하게 된다. 각 테마별 로고와 디자인과 같은 가이드라인이 나오면 각 부서에서 그에 맞는 마케팅 플랜을 작성해서 물류 조달과 사전 고지가 있어야 하기에 적어도 3개월 전에는 확정시켜 준비를 진행한다. 하지만 1위 후보였던 우리 팀의 우승이 물 건너간 것처럼 준비를 하다 보면 예기치 못 한 상황은 항상 벌어지기 마련이다. 플레이어 데이의 주인공으로 선정된 선수가 갑자기 부진의 늪에 빠진다던지, 여름축제로 준비했던 이벤트를 호우피해로 축소해서 운행하거나 무엇보다 팀 성적이 예상보다 하위권에서 올라오지 않으면 애초에 손님들이 오지 않기에 내용 자체를 뒤집어엎는 일도 있었다. 예상할 수 없는 변수가 가득한 업계에서 몇 수 앞을 보고 예상을 하며 예산관리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막막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이 정도 날씨에 이 정도 성적 그리고 이 정도 손님이 와있으면 오늘 입장 관중은 얼마고 매출은 어느 정도다 하는 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중엔 선배와 최종 매출을 맞춰서 이긴 사람이 음료수 쏘기를 했는데 내가 더 잘 맞추는 시즌을 맞이하면서 조금은 눈앞의 일이 아닌 전체가 보이기 시작하는 기분이 들어 내심 기뻤다.


이후에 부서를 옮기며 다른 곳에서 개막을 준비하고 맞이했는데 매 년 이맘때 즈음에 선배들과 자정이 가까워지는 시간에 봄이 오는 게 너무 싫다고 이야기하며 일을 했는데 막상 캠프에서 만난 손님들의 반응이나 우리가 열심히 준비했던 것들을 제대로 즐겨주시고 기뻐해 주시는 모습을 보면 내년에는 더 잘해야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고는 했다. 내가 조금 더 일을 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한 해의 큰 즐거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니 이왕 하는 거 더 잘하고 싶어졌다. 비록 내가 멋진 홈런을 치거나 입이 절로 벌어질 만큼의 플라잉 디그를 잡을 수는 없지만 그런 플레이를 즐기는 시간과 공간을 더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건 큰 기쁨이었다. 지금 가장 바쁜 시즌을 보낼 나의 옛 동료들과 새 시즌 준비를 하며 야식을 먹던 돔 사무실이 오늘은 조금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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